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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특파원 칼럼] 이토 시오리의 저항 / 김소연

등록 2020-10-22 18:21수정 2020-10-23 02:39

이토 시오리 누리집 갈무리.
이토 시오리 누리집 갈무리.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지난달 22일 ‘2020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을 선정해 발표했다. 우리나라에선 케이(K) 방역을 책임지고 있는 정은경 질병관리청장과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이름을 올렸다. 명단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한 사람에게 눈길이 갔다. 일본 ‘미투 운동’의 상징인 이토 시오리다. “이토는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용기 있는 고발로 일본 여성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여성학자 우에노 지즈코 도쿄대 명예교수의 소개글이다.

이토는 언론인 지망생이던 2015년 4월 야마구치 노리유키 당시 일본 <티비에스>(TBS) 방송 기자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가해자에게 “당신의 사죄를 받고 싶다”고 전달했지만 돌아온 건 “그런 적 없다”는 대답이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저널리스트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자신에 대한 진실조차 마주할 수 없다면 이 일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경찰에 신고했고 그 순간부터 새로운 고통이 다가왔다. 언론계에서 일할 수 없을 것이라는 협박부터 어떻게 성폭행을 당했는지 인형으로 재연하라는 요구까지 응해야 했다. 여러 증거를 제출했는데도, 검찰은 혐의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이토는 일본의 법과 사회 시스템이 성범죄 피해자들을 위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실제 일본 성폭행 사건 중 신고로 이어지는 비율은 5% 미만이다. 머릿속에 가족들 얼굴이 어른거렸지만 이토는 유서까지 써둔 상태에서 2017년 5월 세상에 얼굴을 드러냈다. 일본에서 성폭행 피해자 중 최초로 신분을 공개하고 민사소송에 나선 것이다. 기자회견 이후 ‘2차 가해’와 협박으로 신변 위협을 느껴 영국 런던으로 몸을 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토는 포기하지 않고, 더 크게 말하기로 결심했다. “이야기를 하면 누군가에게 닿는다.” 그는 이 말을 부여잡고 자신의 성폭행 내용을 담은 책을 내고, 내·외신 인터뷰, 강연, 토론회에 적극 임했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이토는 지난해 12월 손해배상 1심 재판에서 승소했고, 2심을 받고 있다. 심각한 2차 가해를 한 정치인, 만화가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도 제기했다. 꿈쩍할 것 같지 않던 일본 사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회에선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조사 관행 개선을 촉구하는 국회의원 모임이 만들어졌다. 2018년 4월엔 언론사 여기자가 후쿠다 재무성 사무차관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폭로하자 야당 의원, 기자, 변호사, 연구자 등 200여명이 피해자와 함께하겠다며 ‘With You’(당신과 함께) 캠페인에 동참했다.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이 지난해 4월 ‘플라워 데모’라는 조직을 만들어 1년 동안 매달 한번씩 거리로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다. 이들은 “성폭행을 없던 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미래를 바꾸기 위해 아픔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외쳤다. 이토의 저항 이후 일본 사회는 확실히 다른 풍경이 됐다.

이토는 자신의 꿈인 저널리스트 활동도 열심이다. 인터넷에서 자신의 이름을 치면 늘 따라오는 ‘성폭력 피해자’라는 말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저널리스트를 추가하고 싶다고 했다. 프리랜서로 해외 매체에 영상 뉴스와 다큐멘터리 작품을 내보내고 있다. 일본 ‘고독사’ 문제를 다룬 다큐는 국제 미디어 콩쿠르 ‘뉴욕 페스티벌’에서 상도 받았다. 이토의 저항을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면 마음이 뜨거워진다. 아프고 미안하고 고맙고, 이런 여러 감정이 부딪힌다. 이토에게 하고 싶은 말은 딱 한 가지다. “당신을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김소연 l 도쿄특파원

dand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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