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짙은 그림자가 걷히지 않은 채 새해를 맞는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과 인식과 삶과 관계를 모두 바꿨다. 그동안 인류가 구축해온 유·무형의 자산과 가치와 체계와 질서를 코로나19는 하루아침에 허물어뜨렸다.
코로나19가 사라지더라도, 세상은 코로나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다. 코로나19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2021년 초두, <한겨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코로나19 이후의 전망을 담은 석학과 전문가들의 특별기고 ‘2021, 11개의 질문’을 마련했다.
“앞으로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많이 듣는 말이다. 사람들은 ‘뉴 노멀’이니 ‘넥스트 노멀’이니 하는 말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물론 우리는 다시 ‘노멀’을 회복할 것이다. 전례 없는 역병의 사태를 어떻게 다룰지 익숙해지게는 될 터이다. 그러나 익숙해진다고 바라는 미래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니다. 희망은 익숙한 노멀을 넘어서야 이루어낼 수 있다.
혹독한 재난은 역설적이게도 진보의 길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재난은 우리가 살아왔던 노멀의 실상을 가차 없이 드러낸다. 우리가 어떤 통념에 의존해왔고 어떤 부조리에 눈감아왔는지 확연하게 보여준다. 이렇게 드러나는 민낯을 통렬하게 성찰할 때, 비로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학교 교육에서도 그렇다. 코로나19는 우리 교육의 실상을 초연하게 벗겨 보여준다. 모든 재난이 그렇듯, 코로나19도 약자에게 가혹하다. 학교가 문을 닫자, 달리 갈 데 없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교육 기회는 그냥 사라졌다. 하루 벌이의 생명줄을 놓을 수 없는 부모는 위험을 무릅쓰고 ‘대면’의 직장으로 출근해야 할 터이다. 남겨진 아이들에게 각 한대의 컴퓨터나 ‘기가급’ 인터넷 속도가 쉬이 주어질 리 없고, 공부를 보아줄 어른이나 조용한 공부방은 엄두 낼 여지도 없을 것이다. 코로나19는 그들을 모질게 교육의 사각으로 몰아세운다.
우리는 새삼스러운 듯 교육격차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사실 격차는 어제오늘의 현상이 아니다. 차이는 이미 확연히 드러났었고, 방학으로 학교가 닫혔을 때 격차가 결정적으로 굳어진다는 사실도 확인한 지 오래다. 교육격차는 코로나19가 가져온 게 아니다. 있던 대로 드러냈을 뿐이다. 교육격차는 미구에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늘 우리 사회에 강고하게 붙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격차 문제에는 옹골지게 대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제까지와 달리 더 근원적으로 대들어야 한다.
우리는 격차를 ‘상대적인’ 문제로만 보아왔다. 격차라는 말을 쓰는 것 자체가 그런 인식을 드러낸다. 우리는 격차를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 사이의 차이’로 보아왔고, 코로나19 사태를 맞아서도 그 차이가 더 벌어질 터여서 문제라고 규정한다. 상대적 차이에만 관심이 쏠린다. 경쟁의 맥락으로만 교육을 보는 우리에게 이런 인식은 퍽 자연스럽다. 그러나 격차를 상대적으로만 보아선 학교 교육 문제의 정곡을 놓친다. ‘절대적으로’까지 문제 삼아야 한다. 상대적인 차이를 줄이는 게 우선 과제이긴 하지만, 경쟁에서 밀리고 있는 학생들을 지원하는 데만 그치면, 문제를 다루다 마는 꼴이 된다.
교육격차는 모든 학생이 걸려 있는 문제이다. 불우한 학생이 처지는 현실은 그들이 경쟁에서 밀려나기 때문에만 안타까운 게 아니다. 문제는 더 근본적인 데 있다. 교육이 미흡할 때 결국 인간다운 삶의 기회를 잃게 되는 데 있다. 그 기회는 불우한 학생들보다 높은 점수를 얻는다고 해서 보장되지도 않는다. 그런 기회가 높은 점수로 보장되려면 학교 교육 자체가 바로 서 있어야 한다. 잘못 들어선 길을 앞서 달리는 게 의미가 없듯, 학교 교육 자체가 문제일 때 상대적 우위는 삶에 무의미하다. 교육격차를 해결하려면 당연히 격차를 줄여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교육 자체를 바로잡아야 한다. 불우하든 유복하든 모든 학생에게, 학교 교육 자체가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토대로서 충분해질 수 있어야 한다.
학교 교육을 바로잡으려면, 먼저 교육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반추하지 않을 수 없다. 학교가 보장해야 할 ‘충분한 교육’이 무엇인지는 결국 우리 사회의 집합적 기대, 즉 민의에 따라 결정될 터이다. 그 기대를 정의하는 우리의 ‘상식’을 성찰하지 않고는 학교 교육을 바로잡을 수 없다.
개인이든 사회든 위기에 본색을 드러낸다. 위기는 정상을 허물고, 무너진 정상을 복원하기 위해 모두 다급하게 달려들게 된다. 그 다급한 움직임에 본색이 묻어난다. 학교 교육에 대한 우리 생각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코로나19는 학교를 폐쇄시켰고, 정부는 ‘온라인 개학’으로 정상 회복을 시도했다. 경황없는 가운데서도 교육부는 온라인 사태에서 수업이 성립되는 조건을 하달하는 걸 놓치지 않았다. “원격수업 운영 기준안”으로 수업의 일반 요건을 규정했고, “원격수업 출결·평가·기록 가이드라인”으로 수업 운영 지침을 구체화했다. 학교 수업이 갖추어야 할 필수요건을 제시했던 셈이다. 이런 조치는 결과적으로 주효했다. 그 틀에 따라 학교 교육이 돌아갈 수 있었다. 물론, 응급조치가 충분할 수는 없었던 만큼 논란은 계속 분분했다. 어쨌거나 이런 일련의 조치와 논란에서 우리는 학교 교육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읽을 수 있다. 학교 교육 체제로 굳어져온 우리의 상식이 거기에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교육부의 조치와 이어진 논란의 대종은 ‘평가’(시험)와 ‘기록’에 대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비대면’ 상황에서 시험은 어떻게 칠 거며, 그 경우 평가는 공정할지, 그리고 학교가 닫혀 학생부 기록이 빈약해지게 되는 건 입학전형에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며 유불리를 따졌다. 교육부는 사실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대비했던 셈이다. ‘평가’와 ‘기록’을 특정해서 가이드라인을 내렸던 것은, 평가와 기록이 사실상 학교 교육의 모든 것이라고 여기는 우리의 통념에 충실한 것이었다. 교육부가 수업 양식이나 출결 관리 등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내렸지만, 그것들은 학교 교육을 가늠하는 요체로 여겨지지 않았다.
우리의 일상 이야기에서 학교 교육은 평가와 기록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다.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는 것은 곧 첨예한 경쟁 상황에서 남보다 높은 점수를 얻고 그 기록을 학생부에 남겼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런 상식을 코로나19의 위기에서도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포스트 코로나’는 필경 이런 상식과 노고의 연장에 있을 것이다. 코로나19의 위협이 사라지는 대로 우리는 학교 교육을 다시 ‘정상화’시킬 것이다. 그 상태를 뉴 노멀이라 하든 넥스트 노멀이라 하든, 수업과 학습이 여전히 평가와 기록에 매이도록 복원할 것이다.
그렇게 맞게 될 미래의 ‘노멀’에서 학교 교육은 나아지는 것인가? 그럴지 모른다. 교사들은 온라인 ‘노하우’를 얻었고, 학교 ‘인프라’도 탄탄해졌다. 가정에 컴퓨터를 지원할 체제도 갖췄고, 사회 전체가 ‘비대면’ 수업에도 익숙해졌다. 위기가 다시 닥친다면 우리는 더 잘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의 평균 성적도 올라갈지 모른다. 그러나 성적이 오르는 만큼 배움에 대한 싫증이 커지고, 무한 경쟁으로 학생들의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는 양상은 여전할 공산이 크다. 코로나19 이전과 이후의 노멀에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교육으로 미래 세대에게 뜻깊은 삶의 기회를 주려면, 우리는 코로나19가 들춰낸 우리의 상식을 깨야 한다. 우리가 감염돼 있는 학교 이야기를 털어내야 한다. 우리가 무심코 하는 학교 이야기가 실제로 우리 학교를 만든다. 출세의 ‘사다리’, 국가경쟁력의 밑천이라고만 학교를 이야기하면, ‘포스트 코로나’에도 교육은 여전할 것이다. 코로나19 이후 새로워지려면, 이제까지 만연했던 통속 이야기의 ‘역병’(疫病)에서도 헤어나야 한다. 모든 아이가 세계를 읽어가며 삶의 의미를 짓는 곳, 다양한 친구들과 어울려 공동체 엮기를 연습하는 곳이라고, 학교 이야기를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