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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대한민국이라는 숲, 푸르름을 잃은 아이들

등록 2021-01-15 04:59수정 2021-01-15 08:23

[새해 연속기고ㅣ 2021, 11개의 질문] ⑨공동체의 미래
김지은(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서울예대 교수)
권범철 kartoon@hani.co.kr
권범철 kartoon@hani.co.kr

코로나19의 짙은 그림자가 걷히지 않은 채 새해를 맞는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과 인식과 삶과 관계를 모두 바꿨다. 그동안 인류가 구축해온 유·무형의 자산과 가치와 체계와 질서를 코로나19는 하루아침에 허물어뜨렸다.

코로나19가 사라지더라도, 세상은 코로나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다. 코로나19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2021년 초두, <한겨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코로나19 이후의 전망을 담은 석학과 전문가들의 특별기고 ‘2021, 11개의 질문’을 마련했다.

“시간이 있으시면 잠깐만 제 이야기를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2년 전 북유럽의 낯선 도시에서 친숙한 얼굴을 만났다. 국제도서전을 취재하러 온 현지 기자 엘(L)은 인터뷰를 마치고 가방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냈다. 그 안에는 어림잡아 수십년은 된 것 같은 손때 묻은 서류가 들어 있었다. L은 자신을 한국에서 온 입양인이라고 소개했다. 한글을 읽지 못하는 그는 자신과 함께 이국으로 온 이 서류 안에 어떤 말들이 있는지 알고 싶어서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을 만나는 자리에 봉투째 들고나온 것이다.

서류철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획이 흔들리는 볼펜을 눌러쓴 아기의 이름이었다. 이점순. 나는 이런 글씨들을 자주 보았다. 부추 한 단, 배추 한 포기 등을 적어두는 할머니들의 글씨체로 된 세 글자는 한국을 떠날 때까지 L이 이점순으로 불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돌도 지나지 않았던 그는 1981년 어느 병원에 이름이 적힌 쪽지와 함께 맡겨졌다고 했다.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80년대에 태어난 아기에게 ‘이점순’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일은 흔하지 않다. 어떤 할머니가 아기를 맡기면서 자신의 이름을 대신 적었을 가능성을 떠올렸다. 쪽지를 품에 넣어주고 아기를 내려놓는 할머니의 모습을 상상하자 먹먹했다. 그사이에 L은 읽는 법을 단단히 기억하겠다는 듯 ‘이, 점, 순’을 소리 내어 반복했다.

출생지는 ‘충금동’이라고 적혀 있었다. 검색해보니 광주시 충장로와 금남로를 합해 부르는 지명이라고 나왔다. 그러니까 이점순-L이 태어난 해는 1980년이고 장소는 광주다. 아득한 기분을 느끼면서 서류에 쓰인 글을 이어 읽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아기의 엄마는 정신적으로 갑작스러운 어려움을 겪어서 양육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아버지는 신원불명이라고 적혀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태어난 한 아기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르나 그는 그렇게 북쪽 나라까지 왔다. 이점순-L은 충금동은 어떤 동네냐고, 아기를 못 키울 정도로 먹고살기가 몹시 어려운 곳이냐고 물었다. 당신이 태어났던 무렵에 광주는 참혹한 시간을 겪고 있었다고 했더니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광주라는 도시의 아픔을 안다고,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영문판을 읽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곧 이점순-L에게 대한민국이 어린 당신을 타국으로 보낸 이유에 대해서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그는 왜 아무도 나를 함께 길러줄 수 없었냐고 되물어왔다. 어린 이점순-L은 텔레비전으로 88올림픽을 보면서 저렇게 화려한 축제를 여는 나라가 한 사람의 아기를 키울 수 없어서 자신을 여기까지 보내버렸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우리에게 양육의 공동체는 없었냐고 물었다. 양육의 공동체는커녕 양육 포기를 부추긴 것이 그때의 국가가 한 일이다. 비극 속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어린이들이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1980년대 한국의 해외입양은 최고조에 달했다. 정부가 출생 아동의 1%가 넘는, 연간 8천명 이상의 아동을 남의 나라로 보내면서 내세운 명분은 ‘이민 활성화와 민간 외교’였다. 걸음도 떼기 전의 어린이들이 ‘민간 외교’의 명목으로 외화를 챙기는 수단이 되었다. 당시 입양기관들은 입양 부모로부터 아동 1명당 5천달러를 받았는데 8837명이 국외 입양된 1985년에만 연간 4418만달러 정도가 국내에 들어온 것으로 추산한다.

김지은(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서울예대 교수)
김지은(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서울예대 교수)

새해 첫 주부터 우리 사회는 살리지 못한 한 어린이를 추모하며 슬픔에 잠겼다. 죽음의 실체를 밝히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사각지대의 어린이를 구조하는 것이다. 코로나19로 가정보육이 늘어나면서 어린이가 학대에 방치될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 어린이의 불행만큼 공동체의 미래를 절망에 빠뜨리는 것은 없다. 콜더컷이 1879년에 펴낸 그림책 <숲속의 두 아이>는 1560년 영국의 노퍽주 그리스턴홀에서 토머스 디 그레이라는 어린이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실화를 다룬 작품이다. 일곱살 토머스와 여동생은 부모를 잃고 삼촌에게 입양되지만 몇년 뒤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과 굶주림으로 숲에 버려져 목숨을 잃는다. 두 아이는 자신들이 버려지는 줄도 모르고 숲에 가는 길에 곧 자신의 목숨을 빼앗을 사람들과 웃고 재잘거린다. 토머스의 삼촌이 남매를 죽인 것은 아이들이 물려받은 유산을 독차지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남매가 죽은 장소인 웨일랜드우드는 그 후로 ‘슬프게 우는 숲’(wailing wood)이라고 불린다. 사건 이후 그리스턴홀의 사람들은 숲속의 두 아이를 나무판에 새겨 걸어두고 교훈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웃집 아이를 지키지 못한 어른들의 과오를 잊지 않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려고 책에 기록했다.

어떻게 하면 어린이를 불행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어린이는 인간이며, 인간은 자신을 도구로 쓰고 버리는 사회에서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작년만 해도 엔(n)번방, 박사방과 같은 디지털 성착취 범죄자들은 유아방을 개설하여 수익을 올렸고 채팅앱 사용자들은 여자 어린이의 몸과 인격을 사고팔았다. 출생 정책은 아이 한명당 지원금 액수나 아파트 청약 점수를 기계적으로 환산하여 선심 쓰듯 포상으로 내건다. 얼마 전 다자녀 남성과 다자녀 여성이 위장 결혼을 해서 가점을 올리고 아파트 당첨을 받았다가 적발된 사건은 어린이가 어떻게 환금성 아이템이 되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비대면 시대 미디어 속 어린이는 어른에게 즐거움을 주는 모습으로 전시될 때만 ‘조회수’와 ‘좋아요’를 통해서 반짝 사랑을 받는다. 사람들은 가까운 어린이는 귀찮아하고 멀리 있는 어린이의 이미지만 좋아한다. 어른들의 욕망을 채우는 방향으로 가공된 어린이 이미지가 불티나게 팔린다. 그리고 코로나19로 집에만 머무는 어린이는 그런 도구화된 이미지를 롤 모델로 생각하면서 자라나고 도구로 이용당한다. 양육의 공동체는 없고 ‘슬프게 우는 숲’은 도처에 있다.

어떻게 하면 어린이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작가 마해송은 1956년 <여원> 5월호의 ‘한국아동들은 행복한가’라는 특집에 ‘아동들은 무엇을 요구하는가’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에서 어린이들은 마음껏 놀 곳을 달라고 말한다. “우리들은 당초에 어디서 놀라는 말이에요. 방에서 놀면 어지른다고 나가 놀라고 야단이고 마루에서 놀면 뒤숭숭하다고 야단이고 마당에서 놀면 나가 놀라 하고 밖에 나가서 놀면 이누무 새끼 죽여버린다고 동넷집 어른들이 야단이고 큰길에 나가 놀면 아버지에게 붙들려 와서 어머니가 야단 만나지 않아요. 지붕 위에 올라가면 기왓장 깨진다고 벼락이고 땅광에 들어가 놀면 무어 습기가 어떠니 야단이고. 어떻게 좀 마음 놓고 놀아도 좋은 자리를 가르쳐 주세요”라고 따져 묻는다. 현장학습 한번 못 갔던 비대면 시대의 어린이들도 무엇이 가장 간절하냐고 물으면 아마도 뛰어놀 곳을 달라고 할 것이다. 놀 만한 곳은 닫혀 있거나 금지된 채로 그들의 소중한 성장기 일년이 흘렀다.

위의 특집은 “원체 어린이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인습에 젖어 있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어린이들처럼 행복을 구경 못 하는 데가 또 있을까”라고 말한다. 2021년 대한민국의 경제력은 그때보다 높아져서 주요 7개국(G7) 수준의 국민소득을 넘보고 있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우리 어린이의 행복지수는 최하위다. 더 늦기 전에 이 귀한 어린이들을 잘 자라게 하고 건강하게 살게 하려면 사회안전망과 양육의 공동체를 구축해야 한다. 단 한 사람도 남의 집 아기가 아니다. 모두 다 우리 아기들이다. ‘슬프게 우는 숲’이 아니라 ‘환하게 웃는 숲’을 만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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