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짙은 그림자가 걷히지 않은 채 새해를 맞는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과 인식과 삶과 관계를 모두 바꿨다. 그동안 인류가 구축해온 유·무형의 자산과 가치와 체계와 질서를 코로나19는 하루아침에 허물어뜨렸다.
코로나19가 사라지더라도, 세상은 코로나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다. 코로나19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2021년 초두, <한겨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코로나19 이후의 전망을 담은 석학과 전문가들의 특별기고 ‘2021, 11개의 질문’을 마련했다.
2020년은 코로나의 해였다. 우리는 2021년을 코로나 이후의 미래를 위한 씨앗을 뿌리는 해로 만들어나가야 한다.
지난 수십년 동안 에볼라, 에이치아이브이(HIV) 등 300종이 넘는 바이러스가 새롭게 출현했다. 우리는 이 바이러스로 인한 감염병 위기들을 의학적 문제나 경제적 충격의 측면에서만 바라본다. 하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아픈 환자를 놓고, 근본적인 치료는 하지 않으면서 눈앞의 증상만 해결하려 드는 것과 같은 꼴이다. 하지만 앞으로 또 다른 위기들이 도래하는 것을 막고자 한다면, 우리는 인간에 의한 자연의 파괴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숙고해야 한다.
인간은 산업화된 전지구적 식량 및 농업 체계를 통해 거리낌 없이 다른 종들을 착취하고 그들의 터전을 침략해왔다. 이 체계는 합성화합물과 유전자변형으로 범벅된, 영양학적 가치가 사실상 없는 먹거리들을 생산한다. 환경 문제와 동물 보건 문제도 초래한다. 인간이 파괴하고 착취하고 채굴하여 망가진 자연은 새로운 질병들이 발생하는 토양이 된다. 이런 식으로 지금까지 인간은 질병으로 연결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왔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보건위기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위기들, 이를테면 기아, 빈곤, 기후변화, 멸종, 배제, 불공정, 불평등의 위기들과 증상만 다른 같은 위기들이다. 이 위기들은 모두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존재이며, 다른 생명체보다 우월한 존재이기에 자연을 착취할 수 있는 주인이자 소유자, 정복자라는 기계론적, 군사주의적,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에 근본적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위기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 위기의 증상만 다루려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공통의 근본 원인을 해결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이 지속가능한 길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인간은 무한한 성장이 가능하다는 망상 속에서 끝없는 탐욕을 추구하며, 넘어서는 안 되는 지구의 한계를 마구 넘었다. 그 결과 100만개의 종이 멸종위기에 처해 있고, 매일 200종이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위협받는 것은 이들 다른 생명체들만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 자신도 멸종의 벼랑에 몰아넣었다. 우리는 인간도 이미 위협에 처한 종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코로나가 등장한 이후의 세계를 살기 위해서 우리는 위기를 만든 세계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문제의 원인이 된 관점으로는 절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과 분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자연보다 더 우월한 존재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은 남성이 여성보다, 백인이 유색인종보다, 특정한 한가지 신념이 나머지 다양한 신념들보다 뛰어나다는 위계적인 관점, 그리고 자연과 여성을 식민의 대상으로 타자화하는 폭력의 구조를 만든다. 나와 독일 사회학자
마리아 미스는 이 반자연적, 반여성적, 반생명적 식민화의 이데올로기를 자본주의 가부장제라고 부른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결합한 이 체제는 자연을 자기조직적이고 자기생산적인 시스템이 아닌 죽은 물질로, 여성을 주체성, 행위성, 자율성이 없는 수동적인 대상으로 식민화한다.
이른바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는 프랜시스 베이컨은 자연을 죽어 있는 불활성의 물질로 환원하며 ‘남성적인 시간의 탄생’을 경축했다. 르네 데카르트는 다른 생명체를 마구잡이로 채굴되어도 상관없는 생명 없는 기계로 보았다. 존 로크는 공유재인 땅에 대한 약탈과 소유를 정당화했다.
이렇게 부상한 근대의 환원주의적이고 기계론적인 세계관은 곧 자본주의와 결합했다. 애덤 스미스는 “자신의 환경을 개선하려는 우리의 욕구는 자궁에서 태어나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된다”고 주장했다. 스미스에게 영향을 받은 찰스 다윈은 경쟁과 적자생존을 생물학과 진화의 원리로 보았다. 이 관점들은 모두 인간을 이기심을 본성으로 하는 존재, 부족한 자원을 놓고 서로 경쟁해야만 하는 원자화된 존재로 본다. 만약 이들이 자신들의 이론을 구성하면서 경제의 최소 단위를 부르주아 남성 개인이 아니라 어머니로 보았다면, 과연 이런 폭력적인 공리를 정립할 수 있었을까?
이런 관점들이 보지 못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자원을 재생할 수 있는 잠재력, 공동으로 부를 창조하고 그것을 공평하게 나눌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과학자들도 발견하기 시작했듯이, 진화를 이루어온 것은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다. 분자, 세포, 유기체, 생태계, 지구 전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삶을 조직하는 기본 원리는 협력과 상호성이다.
코로나 이후의 세계를 살기 위해서는 탐욕과 폭력을 경축하는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지구와 여성이 중심이 되는 에코페미니즘의 세계관으로 나아가야 한다.
생명을 존중하고 풍요롭게 하는 에코페미니즘에서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본다. 살아 있는 자연 속에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서로 돕는다고 보는 것이다. 이 상호연결성 속에서 자연과 여성은 착취되어야 하는 죽어 있는 물질이나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율적인 존재가 된다. 에코페미니즘은 우리를 분리가 아니라 하나됨으로 정의한다.
통화를 뜻하는 ‘currency’는 어원적으로 ‘움직임’, ‘흐름’에서 나온 말이다. 부를 뜻하는 ‘wealth’는 ‘안녕’, ‘행복’에서 온 말이다. 우리 삶의 통화는 사랑과 돌봄이다. 이것들이 조화롭게 흐를 때 우리는 생태적으로 서로와 연결된다. 돈은 삶의 통화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우리를 시장에 연결시킬 뿐이다. 특히, 디지털금융과 암호화폐는 지역의 자생적인 경제를 식민화하고, 극소수 거부들의 손에만 부를 집중시킨다. 이제 우리는 삶의 통화를 되찾아야 한다.
진정한 부는 씨앗, 땅, 물, 공기이다. 이런 것들은 인간의 이윤을 위해 소유되고 교환되어야 하는 물질도 아니고, 원자재로 채굴되고 착취된 다음 쓰레기로 버려져 지구를 오염시키는 물질도 아니다. 또 진정한 부는 우리의 안녕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우리 스스로 자생적으로 생산하고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에게 지구의 가족이자 시민으로서 풍요를 함께 창조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음을 깨닫는다면, 또 지구에는 넘지 말아야 할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부를 창조할 수 있다.
지구는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숨 쉬는 공기, 우리가 마시는 물, 우리가 먹는 음식, 우리의 의식을 통해서 모든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 다른 존재들과 단절되어 있는 원자화된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식을 확장하여 다른 존재들에게 가닿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 안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경제적, 공감적, 협력적 지성을 통해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고, 이 시대의 긴급한 위기들을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인류가 걷고 있는 길을 계속 간다면 우리는 생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붕괴할 수밖에 없다.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구와 여성이 중심이 되는 경제로 전환해야 한다. 그래야만 지구를 회복시키고 재생할 수 있다. 지구와 여성이 삶과 사랑과 비폭력과 평등의 길을 이끄는 미래를 만들지 못할 때 인류에게는 어떤 미래도 없다.
번역 김박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