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국가정보원에서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한 권춘택 1차장(왼쪽부터), 김규현 국정원장, 김수연 2차장.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6일 김규현 국가정보원장과 권춘택 1차장(해외 담당), 김수연 2차장(대북 담당)을 동시에 경질했다. 지난 1년 반 넘도록 에스컬레이트 돼온 인사 갈등에 대한 뒷북 문책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은 새 국정원장 후보자는 지명하지 않고 후임 1·2차장만 임명해, 1차장이 당분간 원장 직무를 대행하도록 했다. 수뇌부 동시 경질도, 원장을 비워둔 채 1·2차장만 먼저 임명한 것도 모두 전례를 찾기 어렵다. 국가 안보의 중추가 돼야 할 국정원이 수뇌부 인사에서부터 난맥을 보이고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상황이 개탄스럽다.
지난해 5월 윤석열 정부 출범 이래 국정원이 대외적으로 보여준 모습은 수뇌부가 파벌을 지어 자리다툼으로 지새우는 꼴불견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해 10월 인사와 예산을 담당하는 조상준 기조실장이 임명 4개월 만에 돌연 사직한 것이 시작이다. 당시에도 조 실장이 원장과 고위직 인사를 둔 힘겨루기 끝에 밀려났다는 관측이 나왔다. 지난 6월에는 대통령 재가까지 끝난 1급 인사가 닷새 만에 번복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 인사를 주도했다고 알려진 김 원장의 측근 인사가 면직되는 것으로 일단락됐지만, 이후에도 인사를 둘러싼 논란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달 들어서도 원장과 1차장이 조직 주도권을 두고 알력을 빚는 과정에서 감찰처장 등이 대통령 순방 도중 경질되는 등의 정황이 노출돼 빈축을 샀다. 도대체 세계 어떤 정보기관에서 이런 일이 몇번이나 반복될 수 있나.
국가 중추 정보기관이 이 모양이 된 건 결국 전문성도 리더십도 떨어지는 부적격 인사를 요직에 앉힌 윤 대통령의 인사 실패와 국가안보실의 안이한 대응 때문이다. 자신이 한 인사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고위 공직자의 책임을 묻는 데 극도로 인색한 윤 대통령의 독단적 인사 스타일이, 삽으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을 지경이 된 국정원의 내홍과 추락으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다음 원장 인선을 두고도 벌써부터 능력과 상관없이 윤 대통령과 학연·직연 등으로 얽힌 측근 인사들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 사실은 매우 우려스럽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은 정보기관의 정치적 분열과 갈등이 유발한 정보 실패의 참혹한 결과를 웅변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이번만큼은 측근, 지인이 아니라 국정원을 정상화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비전과 능력을 지닌 인물을 지명하고, 국회는 적격 여부를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