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증거 조작의 의혹이 하나둘씩 베일을 벗어가고 있다. 이 사건으로 검찰 조사를 받은 뒤 자살을 기도한 국정원 협력자 김아무개씨의 유서는 여러 가지 충격적 내용을 담고 있다. 김씨는 두 아들 앞으로 쓴 유서에서 “대한민국 국정원에서 받아야 할 금액이 있다. 가짜 서류 제작비 1000만원”이라고 적었다. 이 ‘가짜 서류 제작비’가 중국 삼합변방검사참 명의의 문서를 위조한 대가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검찰이 간첩 사건 항소심 재판부에 낸 중국 공문서가 위조된 사실은 더욱 분명해졌다.
이번 사건의 발단에서 전개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서 국정원이 보인 모습을 보면, 김씨가 혈서로 쓴 ‘국가정보원은 국가조작원이다’라는 글귀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남의 나라 공문서 위조라는 대담무쌍한 행동을 한 것도 기가 찰 노릇이지만 사건이 표면화한 뒤 국정원이 보인 행태는 더욱 놀랍다. 거짓을 덮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하고, 진실을 숨기기 위해 또 다른 은폐조작을 계속해 왔다. ‘진실은폐원’ 혹은 ‘여론조작원’이라고 이름을 붙여도 지나치지 않다. 어떤 면에서는 증거 조작보다 오히려 더 질이 나쁘고 용서받지 못할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국정원의 이런 조직적인 진실 은폐 행위는 국정원 수뇌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국정원 수뇌부라면 사건이 불거진 뒤 곧바로 엄정한 진상조사에 착수하고, 그 결과에 따라 국민에게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책임질 사람은 책임을 졌어야 옳았다. 사안의 성격상 진상 규명이 별로 힘든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국정원 수뇌부가 선택한 길은 정반대였다. 어떻게 하면 국민을 속이고 진실을 감추어 궁지를 모면할까에만 몰두했다.
국정원은 애초 “외교적 마찰을 고려해 참고 있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중국 정부에서 위조라고 밝힌 것은 발급 절차상의 문제일 뿐 ‘내용의 위조’는 아니다”는 주장을 흘렸다. 검찰에 제출한 자체 조사보고서에서도 “조작은 없었다”고 주장했고, 심지어 대검 디지털포렌식센터의 문서 도장 감정 결과에 대해서조차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국정원은 김씨의 자살 기도 사건이 있고 난 뒤에도 여전히 잘못을 시인하기는커녕 어떻게 하면 모든 책임을 민간 협력자에게 뒤집어씌우고 자신들은 교묘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만 궁리하고 있는 듯하다.
국정원의 이런 진실 은폐 행위의 한가운데는 남재준 국정원장이 있다. 그는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무단 유출로 이미 물러나야 할 사람이었다. 그는 국정원이 법과 질서를 무너뜨리고 국가적 명예를 실추시킨 잘못을 바로잡기는커녕 오히려 스스로 법 파괴와 국가적 위신 실추에 앞장섰다. 자격이 없는 인물을 국가 최고정보기관 수장 자리에 앉혀 놓은 필연적인 업보라고 할 수 있다.
증거 조작 의혹 사건은 이제 중국 공문서 위조의 진상을 밝히는 것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게 됐다. 증거 조작의 정확한 경위, 검찰과 국정원의 공모 여부 등도 낱낱이 밝혀야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국정원의 사후 은폐 행위의 진상도 확실히 규명해야 한다. 국정원은 이미 지난해 9월 항소심 초기부터 이런 문서 조작 사실을 알고도 쉬쉬해온 게 검찰 조사 과정에서 드러났다는 언론 보도도 나오고 있다. 국정원이 저지른 은폐 행위의 정확한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남재준 원장에 대한 해임이 필수적임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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