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수사와 관련해 대법원이 26일 검찰에 제출한 자료는 실체적 진실 규명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이미 공개된 410개 파일을 유에스비(USB)에 담아 건넨 수준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나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 등이 쓰던 컴퓨터 하드디스크는 물론이고 공용 이메일 기록이나 법인카드 내역, 관용차 운행일지 등을 하나도 제출하지 않았다. 대법원 쪽이 뒤늦게 하드디스크 임의제출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는 했으나, ‘협조를 마다하지 않겠다’던 김명수 대법원장 약속이 고작 이 정도였는지 매우 실망스럽다.
대법원은 410개 파일 중에서도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일부를 제외했고, 양 전 대법원장 등의 하드디스크는 의혹과 구체적 관련성이 없거나 공무상 비밀이 많이 포함돼 있다는 등의 이유로 검찰에 건네지 않았다. 법관 사찰 및 재판 거래 의혹과 관련해 양 전 대법원장과 박 전 행정처장의 연루 여부를 가리는 것은 검찰 수사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상고법원을 적극 밀어붙인 최고책임자일 뿐 아니라 정권에 협조한 판결 리스트를 들고 박근혜 당시 대통령을 만났다는 재판 거래 의혹의 장본인이다. 박 전 처장 역시 상고법원 추진을 실무적으로 지휘했을 뿐 아니라 판사 사찰을 구체적으로 지시한 정황이 문건에 드러나 있는 유력한 직권남용 혐의자이다.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 등이 이들과 무관하게 스스로 알아서 ‘사찰’하고 ‘거래’한 것이 아니라면, 양·박 두 사람의 컴퓨터 하드디스크에는 보고서 등 유력한 물증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파일을 원천적으로 없앤 디가우싱 행위가 설사 관례였다 해도 사법농단 진상 규명 요구가 커가는 시점에, 그것도 당사자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요청했다면 그 의미가 다르다. 이제라도 검찰의 복구 시도에 협조해야 마땅하다.
검찰 지적대로 관련자 컴퓨터 8대 가운데 3대는 이미 손상됐고,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조사단’이 이 중 5개를 대상으로 블랙리스트 등 법관 사찰 의혹 중심의 검색어를 넣어 추출한 410개 파일만 조사한 상태다. 재판 거래 의혹은 검색 대상에 포함시키지도 않았다. 검찰의 제출 요구를 무리라고 보기 힘든 이유다. 대법원이 공무상 비밀 등을 이유로 제출을 거부한 것도 설득력이 약하다. 특별조사단 스스로 보고서에서 ‘공적 정보 조사에서 작성자나 보관자 동의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을 뿐 아니라, 검찰이 설명한 대로 법원이 유사 사건에서 임의제출 자료의 비밀성을 문제삼은 사례도 찾기 어렵다.
대법원의 소극적 태도는 검찰 수사에 부정적인 고위 법관들 분위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는 소장 법관이나 국민 여론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판단이다. ‘김명수 대법원’이 ‘양승태 늪’에서 벗어나 국민 신뢰를 회복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하드디스크부터 당장 제출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