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재판거래’ 의혹의 당사자로 떠올랐다. 일제강점기 징용 피해자들이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판결을 미루는 대가로 해외파견 법관 자리를 따냈다는 의혹의 수사 과정에서 그의 실명이 나왔다. <한겨레>에 따르면, 2014년 초부터 양 전 대법원장은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에게 여러차례 해외공관 파견 법관 자리를 확보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외교부 자료에서 드러났고 윤 전 장관도 검찰에서 진술했다는 것이다. 실제 법관의 해외파견 자리들이 신설되고 소송은 5년이나 미뤄졌으니 약속대로 ‘재판거래’가 실현된 셈이다.
2013년 10월 이병기 당시 주일대사의 요청 뒤 11월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하면서 사건이 시작됐다. 이에 12월1일 김 실장이 비서실장 공관으로 차한성 당시 법원행정처장(대법관)과 윤 장관, 황교안 법무부 장관을 불러 징용 소송의 연기나 판례 변경 문제를 논의했다고 한다. 이후 2014년 들어 양 전 대법원장이 직접 여러차례 해외파견 법관 자리를 요청했고 실제 유엔대표부와 제네바대표부에 법관 자리가 새로 만들어졌다. 아무리 외교적 사안이라 해도 청와대 비서실장이 대법관과 관련 장관들까지 공관으로 불러놓고 특정 사건에 대놓고 개입한 사실이 드러난 것은 사법사상 초유의 일이다. 게다가 대법원은 이를 기화로 법관 해외파견의 이권까지 챙겼다니 시정잡배만도 못한 파렴치한 뒷거래가 아닐 수 없다.
대법원은 애초 2012년 징용 소송에서 ‘국가가 국민 개인의 동의 없이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킬 수 없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이듬해 대법원에 재상고된 뒤 5년간 이유없이 미뤄지다 ‘사법농단’ 논란이 일자 지난달에야 전원합의체로 넘겨졌다. 그동안 양 전 대법원장은 물론 ‘대법관 일동’까지 재판거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강력 부인해왔으나 이들의 변명은 더이상 설 땅을 잃게 됐다. 이 사건에 비춰 논란이 돼온 다른 사건들에서도 재판거래가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양 전 대법원장은 그동안 사법농단의 최고책임자이면서도 기자회견 뒤엔 부하들이 책임 추궁을 당하는 동안에도 모른 체 외면해왔다. 이제라도 재판거래와 사법농단의 진실을 고백하고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는 게 사법부를 이끌었던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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