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징용 피해 소송을 놓고 청와대·외교부와 대법원이 ‘재판 거래’를 했다는 의혹이 짙어지는 상황에서 현 대법원이 이를 부인하는 취지의 해명을 내놓았다. 대법원은 20일 밤 돌연 민사소송법과 상고심절차특례법을 거론하며 ‘이 사건은 원천적으로 심리불속행이 불가능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피고가 일본 기업이라 ‘국외송달하는 바람에 기한을 넘기게 된 것’이라며 그간 제기된 의혹들을 사실상 부인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 청와대’의 비서실장 공관에서 법원행정처장과 외교부 장관까지 모여 소송 대책을 논의하고 법관 해외파견을 뒷거래한 정황마저 드러난 상황에서 대법원의 이런 해명은 황당하고 당황스럽다. ‘김명수 대법원’이 이처럼 무리하게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 거래를 감싸는 데 골몰하는 것은 스스로 섶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들어 ‘사법불신’의 불길을 확산시키는 꼴이다.
대법원은 2012년 5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가 국민 개인의 동의 없이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킬 수 없다’며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고법에서도 원고 승소 판결하자 피고 기업은 2013년 8월9일 대법원에 재상고했다. 이전 상고심과 쟁점이 달라지지 않아 대법원은 더는 심리하지 않고 4개월 이내에 심리불속행으로 원고 승소를 확정해야 마땅했지만 지금까지 5년을 끌었다. 대법원은 20일 내놓은 해명에서 국외송달이 늦어지면서 심리불속행 기간 4개월을 넘기는 바람에 심리불속행 판결을 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2013년 9월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이 작성한 문건에는 ‘국외송달을 핑계로 자연스럽게 심리불속행 기간을 넘긴다’는 묘안이 등장하고 12월1일 비서실장 공관 회동에서 실제로 차한성 당시 법원행정처장이 이 방식을 언급했다고 한다. 외교부 문건과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 진술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같은 해 10월 임종헌 법원행정처 기조실장이 주철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찾아가 징용 소송 경과를 설명하며 법관 해외파견 자리를 요청하고 양승태 대법원장도 윤 장관에게 같은 요청을 하는 등 ‘거래’ 정황도 뚜렷하다.
사법불신을 극복하고 개혁을 하겠다는 ‘김명수 대법원’의 이런 행보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