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을 지낸 변호사가 압수수색 영장이 여러차례 기각되는 와중에 재판거래의 핵심 증거가 될 만한 기록들을 무더기로 파기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사자는 검찰에 ‘문건을 훼손하지 않겠다’는 서약서까지 썼으나 이를 어겼고, 대법원은 임의제출을 요구하는 검찰에 ‘회수하면 된다’며 늑장을 부렸다. 영장전담 판사는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함께 근무했음에도 ‘회피’ 제도마저 거부한 채 직계 선배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용감하게 기각했다. 조직적으로 증거인멸을 방조한 셈이니 사법부 전체가 공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장 기각률 90%’에 대한 여론 비난도 무시한 채 사법부의 오만함이 막장으로 치달으면서, 지켜보는 국민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음을 판사들은 알아야 한다.
검찰은 지난 5일 국정농단 사건의 박채윤씨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청탁한 특허소송 의혹과 관련해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의 변호사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다 재판연구관 보고서 등 재판기록이 무더기로 유출된 정황을 포착했다. 일제 강제징용 민사소송,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재판, 통합진보당 사건 등 재판거래 의혹 사건을 포함해 수만건에 이른다는 게 검찰 주장이다. 이에 유 변호사한테 문건을 훼손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고 추가로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했으나 기각되자 지난 7일 다시 청구했다. 그런데 사흘 뒤인 10일에서야 영장을 심리하겠다고 나선 박범석 부장판사는 유 변호사의 선임재판연구관 시절 그 밑에서 연구관을 했던 직계 후배였다. 유 변호사는 그사이 전·현직 판사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추억 삼아 갖고 나온 것”이라며 죄가 안 된다고 주장했는데, 박 부장판사 역시 ‘부적절한 행위지만 죄는 안 된다’며 다시 기각했다. 죄가 안 된다면서 그 추억들은 왜 다 없애버렸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전국법관대표회의는 10일 현재의 법원행정처를 폐지하고 사법행정 구조 개편을 추진하기 위해 외부인사들도 참여하는 추진기구가 필요하다고 결의했다. ‘김명수 대법원’은 사법발전위가 구성을 결의한 사법행정회의마저 법관들만으로 꾸리는 방안까지 끼워넣는 등 개혁 의지를 의심받고 있다. 김 대법원장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사법부의 유일한 존립 근거인 국민 신뢰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음을 깨닫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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