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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사설] 이제 ‘위력에 의한 성폭력’ 끝내는 사회로

등록 2019-09-09 18:26수정 2019-09-09 19:25

‘미투’ 1년반 만에 안 전 지사 원심 확정
폭행·협박 없는 ‘위력’ 존재·행사 인정
‘피해자다움’ 벗고 성평등 직장 계기로
대법원 2부(주심 김상환 대법관)가 수행비서 김지은씨를 성폭행한 혐의를 받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원심을 9일 확정했다. 서지현 검사의 고발과 함께 한국 사회 ‘미투’ 운동에 불을 붙였던 김씨의 지난해 3월 폭로 이후 554일 만이다.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이자 평소 젠더 문제에 적극적인 발언을 해왔던 안 전 지사 사건은 우리 사회에 충격과 동시에 ‘권력형 성범죄’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직장 내 성폭력 범죄에 있어 ‘위력’과 ‘피해자다움’에 대한 기준을 확립한 이번 판결을 환영한다.

그동안에도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조항은 있었지만, 실질적 처벌 형량은 그리 높지 않았다. 특히 폭행·협박을 동반하지 않은 무형의 위력에 대해선 인식이 낮았던 게 사실이다. 지난해 1심은 ‘위력은 존재하되 행사되지 않았다’는 이유 등을 들어 공소사실 10건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반면 2심은 ‘위력은 유무형을 묻지 않는다’며 폭행·협박 등 물리적 힘뿐 아니라 정치·사회·경제적 지위나 권세 등을 이용할 수도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위력의 존재와 행사가 따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대법원 역시 이것이 기존의 판례에 맞는다고 확인했다.

사실 위력에 대한 대법원의 판례가 그동안 수차례 있었음에도, 안 전 지사 사건을 둘러싼 논란이 증폭된 데엔 ‘피해자다움’이란 그릇된 통념이 작용한 탓이 컸다. 폭로 이후 김씨는 2차 가해에 시달려야 했다. ‘연애 사건’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도 끊이지 않았다. 1심 재판부 역시 성폭행 다음날 김씨의 행위 등을 들어 피해자의 증언이 신빙성이 없다고 봤다. 반면 2심은 ‘피해자 진술의 일관성’을 인정하며 “피해자다움은 편협한 관점”이라고 강조해 우리 사회에 만연한 2차 가해에 경종을 울렸다. 피해자의 진술 등을 살펴볼 땐 ‘성인지 감수성’을 적극 고려해야 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진술의 신빙성·일관성을 따지는 것을 전제로 하되, 성폭력 사건 심리 때 피해자가 처한 상황, 심리적 상태, 피고인과의 관계 등 종합적인 상황과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대법원이 “범행 전후 보인 일부 언행, 피해자로 보일수 없는 행동이 아니다”라고 명시한 것은 그동안 ‘피해자다움’에 갇혔던 성폭력 판단 기준이 잘못됐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여전히 자신의 피해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수많은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들이 있다. 지난해 서울여성노동자회 평등의 전화에 접수된 직장 내 성폭력 상담 819건 가운데 78%가 사장이나 직장 상사 등이 저지른 ‘위력에 의한 성폭력’ 사건이었다고 한다. 피해자를 향해 ‘왜 거부하지 않았냐’ ‘왜 그 당시 바로 말하지 않았냐’ 같은 질문은 이제 끝내야 한다. 1990년대 초 서울대 신아무개 교수 사건이 우리 사회에 ‘성희롱’이란 문제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이끌어냈듯, 이번 판결이 법리에 그치지 않고 성평등한 직장과 사회로 실질적으로 나아가는 문화를 만드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를 위한 인식의 전환은 사회 구성원 모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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