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선후보 단일화 비교
성한용 선임기자의 대선읽기
정동영-이인제-문국현
후보포기 뜻 아무도 없고
단일화 ‘승산’도 가물
하지만 정치는 생물이라… 정치인들이 정당의 후보 경선에 나서는 이유는 본선에 출마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정당의 대통령 후보가 다시 ‘후보 단일화’를 해야 한다면 비정상이다. 그런 ‘비정상’이 1997년과 2002년에 있었다.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와 이인제 민주당 후보 선출 뒤, 범여권의 후보 단일화는 ‘당연한 수순’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당사자들부터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것을 ‘관성의 법칙’이라고 한다. 1997년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는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와 ‘디제이피 단일화’를 했고, 그 덕에 집권에 성공했다. ‘호남-충청’ 지역연합은 1996년 4·11 총선에서 김대중 총재의 국민회의가 총선에서 패배한 뒤에 집권을 위한 비책으로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 뒤 지리한 협상과 우여곡절을 거쳐 두 사람이 합의문에 서명한 것은 대선 45일 전인 11월3일이었다. 디제이피 연합의 성공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김종필 총재는 대통령이 될 확률이 없었다. 당시 여론조사에 나타난 김종필 총재의 지지율은 한 자리 숫자에 불과했다. 그는 후보를 내주고 정권의 지분 50%를 챙기는 도박을 택했다. 김대중 총재의 선택도 돋보였다. 그는 당시 여론조사에서 이인제, 이회창 후보에게 크게 앞서고 있었지만, 끝까지 단일화를 밀어붙였다. ‘지역’의 위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일화 성공 이후 김대중 후보의 지지율이 크게 올라가지도 않았다. 11월8~9일 <한겨레> 여론조사는 김대중 35.3%, 이인제 28.1%, 이회창 21.0%였다. 이른바 ‘시너지’ 효과는 없는 듯했다. 그러나 지역연합은 실제 선거에서 힘을 발휘했다. 김대중 후보는 이회창 후보를 39만표 차로 따돌렸는데, 대전·충남북에서 40만표를 이겼다. 2002년 노무현 민주당 후보와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는 여론조사라는 초유의 방식으로 후보 단일화를 했다. 반이회창 연합이었다. 대선을 25일 앞둔 11월24일(정확히는 25일 새벽 0시14분)이었다. 노무현-정몽준 단일화의 성공에도 이유가 있었다. 11월21~22일 <한겨레> 여론조사는 이회창 37.4%, 노무현 23.8%, 정몽준 22.3%였다. 노무현 정몽준 두 후보의 지지율을 합치면 이회창 후보를 확실히 이길 수 있다는 객관적 자료가 존재했던 것이다. 단일화 이후 25일 여론조사에서는 노무현 47.8%, 이회창 39.6%였다. 여기에, “지면 정치를 그만둔다”는 노무현 후보의 ‘진정성’과, “반드시 이긴다”는 정몽준 후보의 ‘착각’도 크게 한 몫을 했다. 1997년과 2002년의 후보 단일화는 이렇게 전혀 달랐다. 2007년에도 단일화는 될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섣부른 예측은 위험하다. 다만, 여건이 매우 복잡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단일화의 당사자가 정동영, 이인제, 문국현 세 사람이다. 함수관계가 훨씬 난해하다. 둘째, “후보가 안돼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으로선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셋째, 세 사람의 지지율을 다 합쳐도 이명박 후보의 절반에 못미친다. 단일화를 하면 이길 수 있다는 ‘승산’이 안보인다. 넷째, 내년 총선 출마 희망자들이 후보 단일화에 소극적일 가능성이 높다.
그럼, 안될까? 아직 모른다. ‘다이나믹 코리아’에선 모든 것이 가능하다. 정치공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국민들의 선택’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지지율 격차에 따른 후보 자진사퇴는 엄밀히 말해서 단일화가 아니다. 거기엔 감동도 없고, ‘시너지 효과’도 없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후보포기 뜻 아무도 없고
단일화 ‘승산’도 가물
하지만 정치는 생물이라… 정치인들이 정당의 후보 경선에 나서는 이유는 본선에 출마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정당의 대통령 후보가 다시 ‘후보 단일화’를 해야 한다면 비정상이다. 그런 ‘비정상’이 1997년과 2002년에 있었다.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와 이인제 민주당 후보 선출 뒤, 범여권의 후보 단일화는 ‘당연한 수순’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당사자들부터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것을 ‘관성의 법칙’이라고 한다. 1997년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는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와 ‘디제이피 단일화’를 했고, 그 덕에 집권에 성공했다. ‘호남-충청’ 지역연합은 1996년 4·11 총선에서 김대중 총재의 국민회의가 총선에서 패배한 뒤에 집권을 위한 비책으로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 뒤 지리한 협상과 우여곡절을 거쳐 두 사람이 합의문에 서명한 것은 대선 45일 전인 11월3일이었다. 디제이피 연합의 성공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김종필 총재는 대통령이 될 확률이 없었다. 당시 여론조사에 나타난 김종필 총재의 지지율은 한 자리 숫자에 불과했다. 그는 후보를 내주고 정권의 지분 50%를 챙기는 도박을 택했다. 김대중 총재의 선택도 돋보였다. 그는 당시 여론조사에서 이인제, 이회창 후보에게 크게 앞서고 있었지만, 끝까지 단일화를 밀어붙였다. ‘지역’의 위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일화 성공 이후 김대중 후보의 지지율이 크게 올라가지도 않았다. 11월8~9일 <한겨레> 여론조사는 김대중 35.3%, 이인제 28.1%, 이회창 21.0%였다. 이른바 ‘시너지’ 효과는 없는 듯했다. 그러나 지역연합은 실제 선거에서 힘을 발휘했다. 김대중 후보는 이회창 후보를 39만표 차로 따돌렸는데, 대전·충남북에서 40만표를 이겼다. 2002년 노무현 민주당 후보와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는 여론조사라는 초유의 방식으로 후보 단일화를 했다. 반이회창 연합이었다. 대선을 25일 앞둔 11월24일(정확히는 25일 새벽 0시14분)이었다. 노무현-정몽준 단일화의 성공에도 이유가 있었다. 11월21~22일 <한겨레> 여론조사는 이회창 37.4%, 노무현 23.8%, 정몽준 22.3%였다. 노무현 정몽준 두 후보의 지지율을 합치면 이회창 후보를 확실히 이길 수 있다는 객관적 자료가 존재했던 것이다. 단일화 이후 25일 여론조사에서는 노무현 47.8%, 이회창 39.6%였다. 여기에, “지면 정치를 그만둔다”는 노무현 후보의 ‘진정성’과, “반드시 이긴다”는 정몽준 후보의 ‘착각’도 크게 한 몫을 했다. 1997년과 2002년의 후보 단일화는 이렇게 전혀 달랐다. 2007년에도 단일화는 될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섣부른 예측은 위험하다. 다만, 여건이 매우 복잡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단일화의 당사자가 정동영, 이인제, 문국현 세 사람이다. 함수관계가 훨씬 난해하다. 둘째, “후보가 안돼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으로선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셋째, 세 사람의 지지율을 다 합쳐도 이명박 후보의 절반에 못미친다. 단일화를 하면 이길 수 있다는 ‘승산’이 안보인다. 넷째, 내년 총선 출마 희망자들이 후보 단일화에 소극적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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