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 의원, 보좌관들이 26일 새벽 국회 본청 7층 의안과 앞에서 장도리 모양으로 만들어진 연장을 뺏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날 자유한국당이 패스트트랙 지정을 막기 위해 국회 곳곳을 점거하면서 몸싸움이 벌어졌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신문사 정치부에서 일하다 보면 ‘아, 여기서 더 일하다가는 내 정신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겠구나’ 싶은 순간이 꽤나 자주 찾아온다. 보통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노골적 말바꾸기와 배신, 자기합리화 등이 ‘정치’라는 탈을 쓰고 일상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탈을 쓴 이들에게 아전인수, 침소봉대는 기본 덕목이다. 물론 모든 정치인이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패스트트랙’(신속처리 대상 안건)을 둘러싸고 국회에서 벌어졌던, 그리고 다음주까지 이어질 게 뻔한 저 난장판은 위에서 열거한 ‘나쁜’ 항목들을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국회선진화법을 만들 때 했던 약속과 말을 바꾸고, 정당끼리 또는 정당 내부 논의를 거친 합의와 결정을 뒤집었다. 정치적 사익에 따라 공익과 유권자를 배신했다. 그러면서, 그건 배신이 아니고 자신의 소신이자 정치적 신념이라고 합리화를 하는 이들이 국회를 ‘점거’한 것이다. 이들 중 대부분은 자신의 점거가 “좌파 독재정권”에 맞서 “헌법을 수호하기 위한” 행위라고 아전인수격 의미를 부여한다. 승자독식의 폐해를 막으려는 선거제 개혁 논의엔 아예 귀를 막고 있다가, 이제 와 “선거제는 여야가 합의해왔던 ‘국회 관습법’을 어겼다”며 실정법인 국회선진화법을 적용할 수 없다는 황당한 논리를 편다.
이런 상황이 다음주라고 달라질까. 사사건건 사생결단을 낼 듯한 적대적 정국이 5월엔 바뀔 수 있을까. 국회에 쌓인 산적한 과제, 이를테면 추가경정예산안 처리나 최저임금 결정구조 개편, 탄력근로제 개선 관련 법안 등이 처리될 수 있을까. 5월이 코앞인데 여야 4당이 합의하고 광주 시민들이 염원하는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은 국회를 통과할 수 있을까.
여야의 대치가 극에 달한 26일, 훈수 두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두 명의 노련한(또는 노회한) 정치인이 비슷한 시각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탄핵 때 하나가 되어 저렇게 투쟁을 하였으면 나라가 이 꼴이 되었을까? 늦었지만 투쟁력이 되살아난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지도부가 앞장서서 더 가열찬 투쟁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야당의 역할입니다.”(홍준표)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하는 정치권의 노력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정치가 필요합니다. 물 흐르듯 대화가 필요합니다. 한국당이 조건 없이 회의장 농성을 풀고 대화의 장으로 나와야 합니다. 민주당도 퇴로를 열어줘야 합니다. 북미도, 남북도 대화하는데 여야가 대화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국회도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제안합니다.”(박지원)
누구 말이 맞는지 판단하는 일은 쉽다. 그렇지만 플레이어들이 누구의 훈수 쪽으로 기울지 예상하는 일도 어렵지 않다.
이 사달이 나고 돌이켜 보니, 민주당을 비롯한 여야 4당의 전략에 아쉬운 점이 없을 리 없다. 선거법 개혁이 절실했다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에 일부 기소권 부여’와 꼭 패키지로 묶어야 했을까. 청와대와 여당이 ‘눈에 보이는 성과’에 집착해 상황을 오판한 게 아닐까. 박지원 의원의 제안처럼 지금이라도 판을 갈아엎고 다시 타협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야 국회에 쌓인 시급한 숙제도 함께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상황은 비관적이다. 집단 최면에 걸린 듯 정치투쟁에 나선 자유한국당한테는 홍준표 전 대표의 칭찬과 훈수가 귀에 쏙쏙 들어올 것이다. 적어도 현재의 자유한국당은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입만 열었다 하면 “목숨을 걸고” 좌파 독재정권을 타도하겠다는 이들에게 민생이 보일 리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광화문광장으로, 청와대 앞으로, 국회 중앙홀로, 국회 의장실로 농성하러 가는 이들에게 대화 테이블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국민들은 다음주에도 누가 더 심한 말을 하는지 경쟁하듯 이어지는 ‘폭언 정치’를 지켜봐야 할 듯하다. 선거제 개혁 때문에 국민이 독재에 신음할 리 없고, 고위공직자들을 감시하는 공수처 탓에 서민들이 추가적인 국가폭력에 시달릴 일도 없다. 그래도 한국당의 ‘반독재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투쟁의 목표는 실체도 없는 ‘독재정권’ 타도가 아니라, 그저 ‘현 정부’를 무력화하는 것이니까. 그들은 정말 존경스러울 정도로 최선을 다한다.
석진환 정치팀장 soulfa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