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1일 오후 국회 화상 연설에서 대전차·대공 무기 등의 지원을 한국에 요청했다. <국회방송> 갈무리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1일 국회 연설을 통해 러시아의 탱크·군함·미사일을 막을 수 있는 군사장비 지원을 한국에 요청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오후 국회 화상 연설에서 “러시아의 탱크·배·미사일에 맞서고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살릴 군사 장비들이 대한민국에 있다. 러시아에 맞설 수 있게 도와달라”며 무기 지원을 공개적으로 요청했다. 대공·대전차·대함 무기 등을 구체적으로 요구한 것이다. 미국 등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러시아의 침공 뒤 우크라니아에 휴대용 대전차·지대공 미사일을 수천기 이상 제공했고 우크라이나는 이 무기로 러시아의 전차·헬기·전투기를 저지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런 무기를 (한국한테) 받게 되면 일반 국민의 목숨을 살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를 살릴 수 있는 기회가 되고 다른 국가들도 러시아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을 수 있다”며 “한국이 우리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약 17분간 진행된 연설에서 자국을 침공한 러시아의 무자비함과 전쟁의 참상을 전달하며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도움을 호소했다. 그가 연설 막바지에 공개한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의 영상은 장내를 더욱 숙연하게 했다. 영상에 등장한 마리우폴 시내는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초토화된 모습이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피에 젖은 시신을 안고 절규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마리우폴에서 일주일 이상 체류한 기자가 촬영한 영상”이라며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이런 장면들을 48일째 매일 목격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다른 국가들도 이와 같은 전쟁을 겪지 않고 러시아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영상을 봐주면 감사하겠다”고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영상 상영 후 ”이런 짓은 바로 러시아 짓이다. 여러분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지원해주시기를 요청한다. 감사하다”며 화상 연설을 마무리했다. 이 대목을 전하는 통역사도 울먹였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한국전쟁을 거론하기도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앞서 영국, 이탈리아, 미국, 독일 등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각국의 역사적 배경을 적절히 거론하는 ‘맞춤형 연설’로 이목을 끌어왔다. 그는 이날 연설에서 “우리는 20세기에 이런 파괴를 많이 봤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1950년대에 전쟁을 한 번 겪었고, 수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며 “하지만 한국은 이겨냈다. 그때는 국제사회가 많은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우리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살아남고, 이기려면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며 러시아에 맞설 수 있도록 무기 지원을 거듭 요청했다.
그동안 우크라이나는 한국에 각종 무기 지원을 요청했으나 국방부는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 지원과 관련해서 제한되는 측면이 있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국방부는 지난달 우크라이나에 방탄헬멧과 천막, 모포, 개인용 응급처치키트, 의약품 등 비살상용 군수물자 20여개 물품(10억원 어치)을 지원했다.
우크라이나는 지난달 초 한국을 포함한 외국에 군사·인도적 지원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으며, 당시에도 소총과 대전차 미사일 등 살상 무기가 지원 요청 품목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한국-우크라이나 국방장관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가 헬기나 비행기를 격추하는 대공무기체계 지원을 요청했으나 한국은 ‘살상무기 지원 불가' 방침을 거듭 밝히고 거절했다.
부승찬 국방부 대변인은 이날 오전 정례브리핑에서 “지난 8일 한국-우크라이나 국방장관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에서 무기와 관련된 추가지원 요청이 있었다. 우크라이나 장관께서는 가능하면 대공무기체계 등을 지원해줄 수 있는지에 대한 문의가 있었다”고 말했다. 부 대변인은 이어 “서욱 국방장관은 우리의 안보 상황과 군의 군사대비태세의 영향성 등을 고려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살상용 무기체계 지원은 제한된다는 입장을 설명했다”고 전했다.
당시 통화에서 올렉시 레즈니코프 우크라이나 국방부 장관은 구체적인 대공무기체계를 특정해 요구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한국군 대공무기체계는 천궁(중거리 지대공미사일), 패트리엇, 천마(단거리 지대공미사일), 호크(단거리 지대공미사일), 신궁(휴대용 지대공 미사일) 등이 있다. 신궁을 제외하고는 무기 규모가 커서 우크라이나로 운반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현실적으로 우크라이나에 지원 가능한 대공무기는 휴대용 지대공 미사일인 신궁이 꼽힌다.
신궁은 공중으로 침투하는 적 항공기 및 소형 헬기에 대한 주요 부대와 군사시설 대공방어 임무를 수행하는 휴대용 지대공 미사일이다. LIG넥스원 누리집
한국은 레드아이·재블린·미스트랄·이글라 등 다양한 외국산 대공미사일을 사용하다가 국내 독자 기술로 ‘신궁’을 개발해 2006년부터 전력화했다. 1.6m 길이에 15㎏ 무게인 신궁은 작고 가벼워 군인 2명이 들고 다니며 사용할 수 있다. 신궁은 유효 사거리 5㎞로 저고도로 침투하는 헬기·항공기를 격추하는 데 주로 사용된다.
한편, 김종대 전 의원은 지난 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우크라이나 국방장관의 전화가 오기 전에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같은 요청이 우리 정부에 여러 차례 전달되었다는 점이 확인된다”고 주장했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