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제77차 유엔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은 20일(현지시각) 뉴욕에서 열린 77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담대한 구상’이라는 자신의 대북정책을 국제사회에 소개하지 않았다. 연설문에는 “북한” “한반도 평화” “분단 극복” 등의 용어도 없었다. 윤 대통령의 이번 연설이 역대 한국 대통령들의 유엔 연설과 결정적으로 다른 대목이다. 전문가들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라는데, 왜 그랬을까?
국가안보실 고위관계자는 뉴욕에서 기자들에게 “대북 메시지는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담대한 구상 발표에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그런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담대한 구상’ 제안을 북쪽이 “10여년 전 이명박 역도가 내들었다가 동족 대결의 산물로 버림받은 ‘비핵·개방 3000’의 복사판”(8월18일 김여정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이라며 이미 거부하고, “절대로 핵을 포기할 수 없다”며 “핵무력정책법”을 채택(9월8일 최고인민회의 14기 7차 회의)한 사정 등을 두루 고려했으리라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이런 정세적 고려가 윤 대통령이 ‘담대한 구상’을 거론하지 않은 이유를 온전히 설명하긴 어렵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대통령한테 유엔총회 연설은 한반도 분단 상황을 환기하며 남과 북의 평화·통일 노력에 대한 지지·협력을 유엔 회원국한테 호소할 수 있는 가장 공식적인 자리다. 역대 대통령들이 진보·보수 성향을 불문하고 유엔 연설에 공을 들여 대북정책을 포함한 한반도 평화 구상을 예외 없이 밝힌 까닭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8년 10월,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유엔에서 공식 연설을 하며 ‘불가침·무력불사용을 합의할 남북정상회담과 동북아평화협의회의’ 등을 제안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뒤 첫 유엔 연설(2014년 9월25일 69차 총회)에서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을 소개하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분단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데 세계가 함께 나서주시기 바란다”고 호소했다. 윤석열 정부 대북·대외정책의 롤모델로 평가되는 이명박 대통령도 취임 뒤 첫 유엔 연설(2009년 9월25일 64차 총회)에서 핵폐기와 안보·지원을 한데 묶은 “일괄타결, 그랜드 바겐”의 추진을 제안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매년 유엔총회에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지지를 호소했다.
윤 대통령의 이번 연설을 두고 “역대 한국 정부가 진보·보수 불문하고 쌓아온 관행과 전통에서 명백하게 이탈”했고 “한반도 평화 과정을 관리하고 촉진하는 데 관심이 높지 않음을 드러낸 것”(전직 정부 고위관계자)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까닭이다.
반면 윤 대통령이 연설에서 핵심적으로 강조한 “자유연대”는 사실상 ‘편가르기 외교’를 호소한 것이어서 역풍이 우려된다는 지적도 있다. 외교안보 분야 원로 인사는 21일 “윤 대통령의 ‘자유연대’ 호소는 북한·중국·러시아 등 한반도 평화 과정에 참여와 도움이 절실한 다수의 비자유주의 유엔 회원국을 사실상 적대시하는 메시지”라며 “유엔을 국내 정치의 장으로 여긴 듯한, 대통령 취임사 같은 연설”이라고 비판했다. 이 인사는 “윤 대통령이 국정목표로 제시한 ‘글로벌 중추국가로서 대한민국’을 ‘자유연대’라는 수사로 강조하려 한 듯한데, 인류를 하나의 안보공동체로 상정한 유엔의 기본정신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명백한 오조준”이라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자유’를 21회, ‘연대’는 8회 언급한 반면, ‘북한’과 ‘분단’은 단 한차례도 언급하지 않았다. ‘한반도’는 “유엔이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고”라는, 국제법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맥락에서 딱 한번 언급했다. 실상 유엔은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가 아니라 “1948년 5월10일 선거가 이루어진 지역(또는 38선 이남)에서 수립된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유엔결의 195호Ⅲ, 1948년 12월12일)했다. 한국전쟁 때 38선 이북 지역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행정권을 유엔이 부인한 까닭이다. 일본이 북한과 정상회담을 하고, 북한이 유엔에 회원국으로 가입할 수 있던 국제법적 근거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뉴욕/김미나 기자 nom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