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국제공항을 방문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러시아 국방부 공보실 제공/타스 연합뉴스
1990년대 탈냉전의 전환기에도 한반도는 ‘냉전의 외딴섬’으로 남아 있다는 평가가 있었다. 정확히는 한반도 전체가 아니라 북한만 고립된 것이었다. 남한은 발 빠르게 러시아, 중국, 동구권 국가들과 수교하면서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북한은 외교적 고립감과 안보 불안감, 내부적 식량난 등의 ‘고난의 행군’ 속에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몇해 전부터 ‘신냉전’이라는 말이 나왔다.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과 무역전쟁을 벌였고 바이든 행정부는 경제뿐 아니라 군사·기술 분야까지 중국봉쇄 정책을 강화했다. 미국의 상대가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바뀌었으니 새롭긴 하지만 그것을 ‘냉전’이라고 부르기에는 과거와 상황이 너무 다르다. 세계가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두 진영으로 확실히 분리되지도 않고 거의 모든 지역에서 강대한 국가와 세력들이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다극화’ 추세가 적어도 병행적으로, 어쩌면 더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에서는 신냉전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듯하다. 지난달 18일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을 통해 한·미·일 3국은 ‘사실상의 동맹’을 결성했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큰 구실로 내걸렸지만 미국(과 일본)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위한 핵심 수단이 동북아 지역에서 확보된 셈이다. 북·중·러 3국의 대응을 유발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달도 되지 않은 지난 13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 아무르주에 있는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만났다.
북-러 정상회담에서 서명된 문서나 공동성명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와 전망은 양국 정부의 공식 발표에 의거할 수밖에 없다. 회담 전에 푸틴 대통령은 우주기지에서 회담하는 이유가 북한의 인공위성 개발에 도움을 주는 데 있다고 하면서 “김정은과 군사기술 협력 등 모든 주제에 대하여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크렘린(러시아 대통령궁)도 “북한과 러시아가 공개되면 안 되는 민감한 영역에서 협력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현 상황에서 북한과 러시아는 각자 필요로 하는 것을 서로 주고받았을 것이고 거기에 군사분야 협력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예컨대, 러시아는 김정은 위원장이 전폭적인 지지를 표한 우크라이나 전쟁(‘특별군사작전’)에서 다량의 포탄이 필요할 터인데 북한이 이를 지원하고, 러시아는 군사정찰 위성, 핵추진 잠수함, 항공기, 미사일 방어 관련 기술을 북한에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군대를 파견하고 전후 복구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한편 러시아는 북한에 에너지와 식량을 지원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군사분야 협력 부분을 찬찬히 살펴보면 상호 도움은 되겠지만 필수불가결하거나 시급한 것은 거의 없다. 교착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포탄을 사용해 ‘선제적인’ 대규모 공세를 취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러시아는 이미 현 전선에서 영토적 목표는 달성했기 때문에 보병의 진격을 지원하는 포병 화력을 대규모로 투입할 필요가 크지 않다.
게다가 우크라이나가 반격하더라도 공군력을 포함한 러시아 정규군을 압도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크라이나가 전장에서 러시아를 압도한다면 유럽에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것이고 미국과 유럽은 그것을 결코 수용하지 못한다.
북한 입장에서도 항공기와 미사일방어 기술을 제외하면 기본적인 전략적 억제능력은 이미 갖춘 상태다. 그래서 러시아와 ‘말이 통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혹시 필요하면 북한이 러시아에 포탄을 지원할 수 있고 러시아는 북한에 더 발달된 군사기술을 지속적으로 제공한다는 원칙을 정상회담에서 크게 합의하고 구체적인 것은 실무급 후속 협의를 통해 차근차근 진행할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한겨레S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세요. 클릭하시면 에스레터 신청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한겨레신문을 정기구독해주세요. 클릭하시면 정기구독 신청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김정은-푸틴 정상회담의 진정한 의미는 더 큰 시야와 시간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러시아의 국가전략에서 극동과 북극해 지역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북극항로가 캄차카반도 해역을 거쳐 동해로 연결될 때 필연적으로 한·미·일 ‘동맹’과 만나게 된다. 북한은 러시아의 동부 연안에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유일한 나라다. 이제 북한은 핵무기를 보유한 ‘동맹국’이다. 연해주와 동부 시베리아의 개발에는 인프라 건설과 농업·임업 분야 등에서 자본과 인력이 필요하다.
30년 전에 ‘두만강개발계획’이 유엔개발계획 주도로 수립됐지만 지금 흔적도 없이 사라진 마당에 러시아가 다시 시작하려 한다면 거기에 북한이 있다. 자본과 노동력 모두 소규모이지만 양국의 필요와 능력에 맞춰 천천히 꾸준히 추진해 나가면 된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숙명적 경쟁자 관계에 있고 동북지역 인구가 1억이 넘는 중국과 전면적인 개발 협력에 나서기에는 위험부담이 클 것이다. 북한과 러시아는 지전략적 이익뿐 아니라 경제적 이익도 공유하는 최적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
북·중·러 협력관계는 중국을 통해 미국에 대한 견제와 다극화 세계로 이어진다. 이번 북-러 정상회담 관련 중국이 소외감을 느끼거나 견제 심리를 가질 것이라는 분석은 근거가 박약하다. 북핵 문제 등에서 흔히 제기되는 소위 ‘중국 역할론’은 한-미 상호방위조약보다 더 강한 조-중 우호조약과 군사협력의 역사, 그리고 지전략적 이해관계 등에 기초한 북-중 동맹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거의 미신과 주술 수준이다. 중국은 북·러의 결속이 자신들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크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는 북한과 러시아와 ‘한통속’에 공개적으로 들어가지 않으면서 한·미·일 ‘동맹’을 견제하는 효과는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중국은 러시아와 함께 브릭스(BRICS)와 상하이협력기구(SCO) 등을 확대·강화해 나간다. 아마 북한은 대미 견제 성격이 강한 상하이협력기구부터 참여함으로써 다극화 세계의 ‘정상국가’ 일원으로 발돋움하려 할 것이다.
북·중·러 3국 협력관계는 한·미·일의 그것과 다르다. 미국과 일본은 북한과 완전 단절 상태지만 중국과 러시아는 남한과 수교국이다. 한·미·일은 미국 주도로 묶이지만 북·중·러는 주도국이 없다. 한국의 신냉전적 정책에 중국은 불만이지만 경제제재를 가하지도 않고 오히려 묶였던 대한국 관광 규제를 풀기까지 했다. 러시아 역시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직간접으로 군사지원을 해도 모스크바의 한국 기업을 규제하지 않고 이번 북-러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한국이 원하면 자세히 설명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김정은 위원장도 국제관계 구도가 “신냉전 체제로 전화되”면서 “다극화 흐름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평가했다(2022년 12월, 당 중앙위 전원회의). 아직 신냉전적 구도에서 탈피해 다극화로 나아갈 기회가 남아 있다. 북한을 적이라 규정하더라도, 중국과 러시아를 ‘적대시’하더라도, 대화를 계속한다면 한국이 ‘신냉전의 외딴섬’이 되지 않을 것이다.
문장렬 전 국방대 교수
노무현 정부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략기획실 국방담당, 문재인 정부의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군사과학 기술의 이해’ 등의 저자로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