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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방·북한

연간 2만명 ‘성범죄 재앙’…미군 지휘관 기소권 뺏는다

등록 2021-06-08 04:59수정 2021-06-08 14:00

바이든 ‘재앙’ 수준 군내 성범죄 대책 마련 지시
1만2000명 피해지원 인력 24시간 연중무휴 운영
지휘관에게 사건 보고 않는 ‘제한적 신고’도 가능
한국군 계약직 성고충상담관 48명뿐…“증원 필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지난해 2만명 정도의 남녀 미군이 성범죄 대상이 됐다고 추정한다. 이는 미군 병력의 1%에 해당한다. 만약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서 2만명이 죽거나 다쳤다면, 그것은 막대하고 중대한 사상자로 간주됐을 것이다. 게다가 그 숫자는 줄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 숫자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이는 아군에 대한 아군의 공격이다. 해결해야만 한다”

지난달 9일(현지시각) 마크 밀리 미국 합동참모본부 의장은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과 함께 한 펜타곤 기자회견
에서 이렇게 말하며 군 지휘체계(the chain of command)에서 군내 성범죄 사건 기소권한을 떼어내는 데 반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지휘관들은 군내 성범죄 처리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부하들로부터 잃었다”고 했다. 미군 지휘관들은 군내 성범죄 사건 처리를 자신들의 지휘권 밖으로 빼내 군검찰에 맡기는 방안에 수십년 간 저항해 왔다.

앞서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지난 1월 오스틴 국방장관에게 군내 성폭력 대응 방안 마련을 지시했다. 오스틴 장관은 2월26일 대통령 명령에 따라 90일간 군내 성범죄 예방과 군 조직문화 개선, 피해자 보호·지원 관련 권고안을 마련할 독립적 검토위원회 구성을 지시하며, 펜타곤이 그동안 성범죄 사건들을 어떻게 처리해 왔는지 점검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활동 종료를 앞둔 검토위원회가 군내 성범죄 기소권한을 지휘관에게서 분리하는 권고안을 제시하자 군 최고수뇌부가 이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최종적으로 의회 문턱만 넘으면 되는 상황이다.

미군 내 성폭력 범죄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재앙’이라고 말할 정도로 뿌리 깊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13년 전인 2008년 제인 하먼 연방 하원의원이 군내 성범죄를 가리켜 “조국을 지키겠다고 선서한 여군들이 적군 공격으로 죽는 것보다 동료 군인으로부터 강간 당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지난해 6월에는 미 육군 최대 기지인 텍사스 포트후드에서 근무하던 바네사 기옌(당시 20) 일병이 실종 두 달 만에 주검으로 발견됐다. 기옌은 실종되기 전 주변에 ‘상관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신고하려 해도 보복이 두렵다’ ‘성폭력 피해를 알려도 부대에서 무시한 사례도 알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미 국방부는 육군, 해병대, 해군, 공군, 주 방위군, 해안경비대 등 각 군에서 발생한 성범죄를 분석한 연례보고서를 발간한다. 2020년 회계연도 보고서는 지난 달 공개됐다. 모두 7816건의 성범죄 사건 보고(입대 전 사건 614건 포함)가 있었다. 미국은 2000년대 중반부터 군내 성범죄의 제도적 해결에 노력해 왔지만 최근 몇 년 연간 7천건 안팎의 성범죄가 꾸준히 보고되는 실정이다. 이마저도 지난해 성범죄 피해자 2만명(추정)에 견주면 3분의 1 정도만 보고된 셈이다.

그럼에도 미군의 성폭력 피해자 보호·지원 제도는 한국에서 주요하게 참고할 만하다. 미 국방부는 2005년부터 성폭력 대응 관련 정책을 총괄담당하는 성폭력예방대응국(SAPRO)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국방부 의뢰를 받아 진행한 <군 성고충전문상담관 제도 발전 연구>(2019년 12월 발간)를 보면, SAPRO는 △성폭력 예방 및 대응 온라인 커뮤니티 관리 △국방부 세이프 헬프라인(DoD Safe Helpline) 관리 △국방부 성폭력대응담당관(SARC) 및 피해자옹호관(SAPR VA) 인증 프로그램 관리 △국방부 성폭력 사건 데이터베이스 관리를 주요 업무로 한다. 특히 해외 파병지역을 포함한 모든 주둔 지역에 하루 24시간 연중무휴로 세이프 헬프라인(2011년 도입)과 피해자옹호관 제도를 운영한다. 미군 내 성폭력 피해자 지원인력은 성폭력대응담당관 900여명, 피해자옹호관 1만1000여명에 달한다.

미군 성폭력 신고제도는 제한적 신고와 비제한적 신고로 나뉜다. 피해자가 제한적 신고를 한 경우 군 지휘체계를 통하지 않는다. 지휘관 보고는 물론 사건 조사도 진행되지 않는다. 피해자는 가해자 신원도 밝힐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응급 치료 및 의료서비스, 법의학적 증거 확보, 상담 지원 등을 받을 수 있다. 상담내용은 예외적 상황을 제외하고는 지휘계통에 공개되지 않는다고 한다. 지휘관에게는 성폭력 발생 장소와 날짜, 피해자 성별만 보고할 뿐 피해자 정보 등 세부사항은 공개하지 않는다. 사건 신고 1년 뒤 피해자에게 비제한적 신고로 전환할지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를 밟는데, 피해자가 여전히 제한적 신고를 원할 경우 피해기록은 5년 보존 뒤 파기한다.

피해자가 공식 조사를 희망하는 비제한적 신고를 할 경우 변호사 상담 등 법률 지원 등을 받을 수 있다. 비제한적 신고를 하더라도 사건 관련 세부사항은 합법적으로 알 권리를 가지는 소수인원에게만 공개된다고 한다. 지난해 미군 성범죄 보고 사건 7816건 중 사령관 보고 등 공식 조사 형태로 진행되는 비제한적 신고(5640건)가 제한적 신고(2176건)보다 2배 이상 많았다.

주한미군 오산 공군기지 SAPR 홈페이지에는 군내 성폭력 신고 24시간 핫라인 연락처와 함께 미 국방부 세이프 헬프라인 전화번호 및 홈페이지 안내가 뜬다. 제한적 신고의 경우 △지휘관에게 알리지 않는다 △조사에 착수하지 않는다 △피해자옹호관 지원이 가능하다 △의료 지원이 가능하다 △나중에 비제한적 신고도 가능하다 등을 안내한다. 비제한적 신고의 경우에는 △지휘관에게 보고된다 △조사가 시작된다 △신속한 전출 선택이 가능하다 △접촉금지명령 및 보호명령이 가능하다 등의 안내가 뜬다.

7일 성남 국군수도병원에 마련된 고 이아무개 공군 중사의 분향소. 연합뉴스
7일 성남 국군수도병원에 마련된 고 이아무개 공군 중사의 분향소. 연합뉴스

태극문양 위를 두 대의 전투기가 비행하는 한국 공군 20전투비행단 부대마크를 달았던 이 중사의 현실은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제까지 공개된 자료 등을 종합하면, 이 중사는 성추행 피해사실을 회식 동석자였던 노아무개 상사에게 보고했다. 노 상사는 다시 이를 자신의 상관인 노아무개 준위에게 보고했고, 노 준위는 이 중사를 불러 사건 무마를 시도했다. 노 준위는 사건 무마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그제서야 대대장에게 성추행 사건 발생을 알린다. 대대장이 군사경찰에 사건을 신고하기까지 이 중사의 상관 상당수가 성추행 사건을 알게 됐고 회유와 압박을 가했다. 군사경찰과 군검찰은 늑장수사로 일관했다. 이 중사의 고통은 가중됐고 심지어 15전투비행단으로 전출한 뒤에도 성추행 사건 처리를 두고 압박이 이어졌다.

미군 성폭력대응담당관, 피해자옹호관과 유사한 제도가 한국군에도 있다. 현역 또는 군무원이 맡는 양성평등담당관(2015년), 민간인 성고충전문상담관(2014년) 제도가 그것이다. 2017년 5.9%였던 여군 비중은 2020년 7.5%로 늘었다. ‘국방개혁 2.0’에 따라 2022년에는 8.8% 이상이 될 전망이다. 그런데도 현장에서 피해자 지원업무를 하는 성고충전문상담관은 현재 일부 군단과 비행단에 1명 정도가 배치되는 수준이다. 2017년 전군에 22명이 배치됐던 성고충전문상담관은 2020년 48명으로 늘었다. 이들이 전군에서 발생하는 성범죄 상담을 하는 상황이다. 여군뿐 아니라 병사의 성고충 상담 수요까지 고려하면 증원이 필요하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여군 확대 목표에 맞춰 추가로 62명이 더 필요하다고 본다.

국방부는 지난 1월 업무보고에서 ‘디지털성범죄 처리기준 신설 및 피해자 보호제도 보완’을 통해 피해 상담 및 신고시스템 보완, 성고충전문상담관 인력 확대 등을 추진실적으로 보고했다.

이 중사는 숨지기 전 20전투비행단 소속 성고충전문상담관과 22차례 상담을 받았다고 한다. 다만 미군 피해자옹호관과 한국 성고충전문상담관의 역할과 처우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들은 민간인 계약직(2년)이다. 재계약에 중요한 근무평정 항목에는 부대 간부들과의 원만한 대인관계 유지 등 ‘협조성’ 항목도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보고서에서 “성고충전문상담관 제도는 남성중심 조직에서 성희롱·성폭력으로 위축된 여군에게 심리적 안정과 대응 정보를 제공하는 데 있어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하면서도, 전문상담관들이 일선에서 겪는 ‘고충’을 육성으로 전하고 있다.

“저희를 어떤 시각으로 보냐하면 ‘쟤들이 가면 여군들을 꼬드겨서 문제화(시킨다)’ ‘예전에는 그냥 지나갈 수 있었는데 문제화해서 사건화 한다’는 인식이 없지 않아 있어요.”

“무인도에 던져놓고 살아남으라고 했던 거 같아요. 얼마나 배척을 하는지.”

“저는 완전히 적군이 되는 거죠.”

“사건이 일어나면 (군 구성원에게 가는 결과가) 기본이 정직이고 아니면 형사사건이 되는 거예요. 항상 내부의 적인 거예요. 93% 이상이 남군이다 보니까. 그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저희가 일하는 환경이 어려울 수밖에 없어요.”

“군인들은 무조건 지휘관에게 모든 것을 보고하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피해자가 대대장에게 보고를 안 하고 (성고충전문)상담관이 (대대장 상관인) 참모장에게 (보고)해서 거꾸로 내려오잖아요. (대대장이) 앙심을 품죠. 피해자에 대해서 ’나한테 얘기를 안 하고 상담관에게 얘기해서 거꾸로 떨어지게 만들어?’”

“’왜 헌병(현 군사경찰)에 신고 안하고 보고했느냐’ 하면서 저를 공격했던 적이 있어요. 저희는 보고라인이 있어요. 헌병에서 그게 괘씸한 거예요. 사건이 인지가 됐으면 헌병과 상의를 했어야 하는데 (위에서 사건이) 떨어지게 된 것에 대한 괘씸죄가 걸려서.”
20대 국회 때인 2018년 3월 김병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방부 안에 SAPRO와 유사한 기능을 갖는 독립적 성폭력특별대책위원회 설치, 매년 군 성폭력 실태조사, 지휘관의 성폭력 피해 내용 누설 강요 등을 처벌하는 법안(군인복무기본법 일부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17년 11월과 2018년 2월 군 성폭력 방지 정책을 총괄하는 독립기구 신설을 국방부에 권고했다. 이에 국방부는 2021년까지 군 성폭력 전담조직 신설을 목표로 미군 SAPRO 등 외국군 사례를 연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군 성폭력 실태조사는 현재 3년 주기로 실시된다. 2016년 처음으로 여성가족부와 국방부 공동으로 실시했는데, 당시 여군 중 8.4%가 최근 1년 내 성희롱 피해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2019년 조사에서는 11.4%로 늘었다. 남성중심 폐쇄적 계급조직인 군의 특성상 해마다 실태조사를 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성고충전문상담관들은 지휘관이나 중간간부들로부터 피해자 상담 내용 등을 알려달라는 압박을 받곤 했다고 털어놓았다. 국회 국방위원회는 검토보고서에서 “성고충전문상담관은 민간 신분 계약직으로 지휘관의 근무평정 결과가 계약연장에 영향을 받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부대 사정이나 지휘관 의도가 반영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점을 고려할 때 피해 내용 누설 강요 처벌은 필요한 입법조치”라고 밝혔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한편 국방부는 지난해 7월 장성급 지휘부대의 보통검찰부를 폐지하고 국방부 장관 및 각군 참모총장 소속으로 검찰단을 설치하고, 부대장이 가진 구속영장청구 승인권 폐지 등을 담은 군사법원법 개정안을 국회에 냈다.

군검사는 현재 각군 참모총장 및 군검찰부가 설치돼 있는 소속 부대장의 지휘·감독(기소·불기소 결재, 구속영장청구 승인권 등)을 받도록 하고 있다. 국회 법제사법원위회는 검토보고서에서 “지휘관은 자기 휘하 부대에서 발생한 사건이 진급평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축소·은폐 하려는 유혹을 떨치기 어렵다. 이로 인해 군내 사망사고를 비롯한 중요사건의 철저한 초동수사, 군내 부조리에 대한 군검찰의 적극적 인지수사를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라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고 밝혔다. 법개정이 이뤄질 경우 보통검찰부는 91곳(2019년 기준)에서 16곳으로 줄어들게 된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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