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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계집 파일’ 사건과 기시감 [숨&결]

등록 2023-05-29 18:53수정 2023-05-30 02:35

공군 전투비행단에서 병사들이 당직자 인수인계 장부로 쓰이는 ‘신송노트’를 이용해 여군 간부들을 집단 성희롱한 사실이 드러났다. 신송노트 자료 일부
공군 전투비행단에서 병사들이 당직자 인수인계 장부로 쓰이는 ‘신송노트’를 이용해 여군 간부들을 집단 성희롱한 사실이 드러났다. 신송노트 자료 일부

[숨&결] 방혜린 | 전 군인권센터 활동가·예비역 대위

군 인트라넷에는 부대 정보를 조회하면 해당 부대에 복무하는 군인 개개인의 소속 부서, 계급, 내선 및 휴대전화 번호, 사진 등 개인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전국에 산개된 60만 대군이라는 큰 집단에서 누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며 복무하고 있는지 쉽게 파악하고, 필요할 경우 원활하게 업무협조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시스템일 것이다.

그런데 한번은 여군들에게 인트라넷에 등록된 개인정보에서 각자 사진들은 지우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왜 여군만이야?’ 의문이 따랐지만 달리 누가 설명해줄 분위기도 아니었고, 또 사진을 개인정보에 입력하는 것이 의무는 아니었기에 찝찝한 마음은 뒤로한 채 별다른 확인 없이 넘어갔다.

‘왜 여군만이야?’라는 의문은 그런 지시가 내려오고 몇달 뒤 풀렸다. 남군들이 인트라넷에서 여군 정보를 조회해 사진을 확인한 뒤 본인 마음에 드는 여군에게 사적으로 연락하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났고, 결국엔 한 부대에서 스토킹 범죄가 발생해 그런 지시를 내리게 됐다는 얘기를 듣게 된 것이다. 여러가지 면에서 거북한 감정이 들었다. 수많은 부대 정보에 하나하나 다 타고 들어가서, 여군이 복무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여군 사진을 조회하고, 개중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찍어 사적 연락을 시도하고, 심지어 스토킹까지 한다고? 그 남군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여군 사진을 찾아본 걸까? 남녀를 떠나서 동료, 전우라는 의식이 있기는 한 걸까? 여군들이 한 부대에 모여 있는 것도 아닌데, 그걸 찾아 일일이 열어봤다는 그 부지런한 정성이 끔찍스러울 만치 대단했다. 그런 정성스러운 수고와 시도를 한 남군이 한명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경악스러움을 더했다.

오래전 일이 떠오른 이유는, 얼마 전 보도된 공군의 ‘계집 파일’ 사건 보도를 접하면서 기시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불특정 다수 병사가 인수인계 문서 파일에다 다수의 여군 사진을 붙여두고 ‘계집 파일’이라고 명명하고선 집단으로 성희롱하는 일이나, 부대 정보와 사진을 하나하나 뒤져서 맘에 드는 여군을 찾아내는 것이나, 당하는 대상으로서는 남몰래 성적인 품평 대상이 됐다는 점에서 둘 다 모욕적인 일이다.

당시 내가 사진을 지우라는 지시가 내려온 배경을 알고 나서 기분 나쁘단 의견을 내비쳤을 때, 한 동료는 농담이랍시고 ‘뭇 남성들에게 인기가 없는 타입의 외모를 가졌기 때문에 너에겐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 안심해라’라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그 상황에서 그런 농담에 “모욕적”이라고 받아쳤다면, 당사자는 내가 외모에 대한 개인적인 지적이라고 생각해 발끈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럼 내가 못생겼다는 말이냐”라는 맥락에서 화를 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계집 파일과 같은 일이 모욕적인 이유는, 함께 복무하는 동료인 여군을 동료로서 존중할 대상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모여 맘껏 품평하고 치욕적인 언사를 내뱉어도 아무런 상관 없는 대상으로 여겼다는 점 때문이다. 계집 파일 사건은 그 자체로 계급체계를 무시한 하극상 성격을 가지지만, 성별을 떠나 공적 관계를 맺고 있는 타인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이자 예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군은 계집 파일의 존재에 관해 보고했는데도 제때 사건 절차를 진행하지 않은 간부들과 파일을 작성한 병사들을 상대로 징계 및 형사 절차를 진행할 것이라 밝혔다. 여군 성폭력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근본적으로는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집단적인 시선과 인식이 왜곡된 것이 문제라는 지적이 매번 나오지만, 개선되기는커녕 항상 새로운 방식의 사건이 이어져 나를 놀라게 한다. 이번에도 사후 조치라며 여군들에게 개인정보에서 사진을 지우라는 식의 지시가 내려오는 건 아닐까? 세월을 두고 반복되는 수많은 계집 파일들의 역사를 봤을 때, 이번 사건의 결말 또한 몇몇 장병들의 일탈로 처리하고 사건을 매듭지으려 하지 않을지 씁쓸함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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