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호 주아프가니스탄대사가 18일 카타르 도하에서 화상 인터뷰를 통해 서울에 있는 취재진에게 대사관 철수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말 급한 상황이다. 빨리 나가야 한다.”
최태호 주아프가니스탄 한국 대사가 경비업체로부터 탈레반 부대가 수도 카불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곳까지 진입했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15일 오전 11시 30분께였다. 최 대사는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이 방어 작전을 펼칠 것이기에 아직은 조금 시간적 여유가 있을 것이라 판단했지만, 우방국의 평가는 달랐다. 이들은 ‘당장 철수’를 권고했다. 최 대사가 정의용 외교장관에게 급박한 현지 상황을 보고하자 곧바로 ‘철수 지시’가 떨어졌다. 철수 매뉴얼에 따라 대사관의 중요 문서에 대한 신속한 파기가 이뤄졌다.
18일 오전 10시(현지시각) 카타르 도하에서 반소매 셔츠 차림으로 외교부 기자단과 화상 인터뷰에 응한 최 대사는 긴박했던 대사관의 철수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옷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고 취재진에게 양해를 구했다. 헬기 탑승을 위해 소지할 수 있는 가방(30㎝×30㎝×20㎝)의 크기가 정해져 있어 ‘필수 소지품’이 아닌 양복을 포기한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 9·11 테러 20주년이 되기 전까지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을 끝내겠다”고 밝힌 뒤, 우방국들 사이에선 아프간 정부가 오래 가지 못하리란 음울한 전망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달부터 ‘8월 말’을 목표로 한 미군의 본격 철수가 시작되자 탈레반의 군사 움직임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8월 둘째 주 소집된 우방국 회의의 다수 의견은 “9월 이후 함락”이었다. 아프간 정부군이 이렇게 며칠 만에 속절없이 무너질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대피 준비를 끝낸 대사관 직원들은 서둘러 인근 우방국의 대사관으로 이동했다. 카불에는 ‘그린 존’이라 불리는 대사관 밀집지역이 형성돼 있어 이동은 5분 만에 끝났다. 그곳에서 우방국의 헬기를 타고 군 공항으로 옮겼다.
16일(현지시각)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미군 C-17 수송기가 이륙을 위해 활주로를 따라 이동하자 탑승하지 못한 아프간 시민 수백 명이 수송기를 따라 내달리고 있다. 카불/AP 연합뉴스
공항은 철수를 서두르는 각국 대사관 직원들과 국외 탈출을 시도하는 아프간 현지인들로 인해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다. 최 대사는 직원들의 우방국 군용기 탑승 절차를 진행하면서 교민들에 대한 안전 대책에 나섰다. 교민 한 명이 “상황을 보겠다”며 현지 잔류 의사를 밝혔다. 최 대사와 직원 두 명은 교민 보호 등을 위해 현장에 남기로 했다. 하지만, 심상치 않은 사태 변화를 감지한 교민 역시 늦은 오후 들어 아프간을 벗어나기로 마음을 바꿨다.
16일 출발하는 군용기에 교민 자리를 확보했지만, 15일 저녁부터 민간공항을 점거했던 아프간 군중이 군 공항으로까지 몰려들어 활주로를 점거했다. 최 대사는 “군중들이 군 활주로로 넘어와서 비행기에 매달리는 상황이 이어졌다”고 말했다. 군중 가운데는 총기를 가진 이들이 있어 이따금 총성이 이어졌다. 그로 인해 공항은 한때 항공기의 이착륙이 불가능한 마비 상태에 빠졌다.
다음날인 17일 새벽 1시께 미군이 군 활주로까지 들어온 군중을 밀어낸 뒤 활주로를 확보했다. 최 대사 등 남은 대사관 직원들과 교민은 이날 새벽 3시 군용기를 함께 타고 아프간을 뒤로했다. 최 대사는 “옛날에 배를 타듯 수송기 바닥에 다닥다닥 모여 앉았다. 탑승자 대부분은 미국인, 저 같은 제3국인, 아프간인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현 아프간 국민의 한 60% 정도가 탈레반 치하를 경험하지 못한 젊은 사람들이고 서구 문명을 경험한 인터넷 세대여서 인권 의식이 높다”면서 탈레반이 예전처럼 경직된 이슬람 원리주의에 따라 국정 운영을 하지 않기 바란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최 대사는 앞으로 주카타르대사관에서 주아프간대사관 업무를 이어가게 된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