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가 19일 주한 이란대사를 불러 ‘아랍에미리트(UAE)의 적은 이란’이라는 윤석열 대통령 발언에 대한 정부 입장을 거듭 설명했다. 사진은 이날 서울 용산구 주한이란대사관의 모습. 연합뉴스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적은 이란”이라고 한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 후폭풍이 확산하고 있다. 이란은 이란 주재 한국대사를 초치해 70억달러(8조6600억원)가량의 원유 대금 문제까지 제기하며 “관계 재검토”를 거론했고, 한국 정부도 이례적으로 주한국 이란대사를 맞초치했다.
이란 외교부는 18일(현지시각) 레자 나자피 법무·국제기구 담당 차관이 윤강현 주이란 한국대사를 테헤란 외교부 청사로 불러 윤 대통령의 발언에 항의했다고 밝혔다. 나자피 차관은 “한국 대통령의 발언은 우호관계에 대한 간섭이나 마찬가지이며 이 지역의 평화와 안보를 해친다. 한국 정부는 이 발언에 대해 즉각 설명하고 접근법을 수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윤 대통령은 지난 15일 아랍에미리트연합의 아크부대를 방문해 “아랍에미리트의 적, 가장 위협적인 국가는 이란이고 우리 적은 북한”이라고 말했다.
특히 나자피 차관은 2018년 미국의 이란 제재 부활 뒤 한국에 동결된 이란 돈 70억달러를 언급하며 “이란 자금 동결에 효과적인 조처를 하지 않으면 이란이 한국과의 관계를 재검토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자피 차관이 언급한 70억달러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2018년 이란 핵합의(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를 탈퇴하고 대이란 제재를 복원함에 따라 한국 정부도 이란의 석유 판매 대금 계좌를 동결하면서 한국에 묶여 있는 이란 돈이다. 70억달러는 외국에 동결된 이란 자금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알려져 있다.
이란 외교부는 또 윤 대통령이 핵무기 제조 가능성을 거론했다며, 이는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어긋나는 것으로 한국 정부가 해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는 지난 11일 윤 대통령이 국방부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북한의 도발 수위가 높아질 경우를 가정해 “대한민국이 전술핵을 배치한다든지 자체 핵을 보유할 수도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 과학기술로 더 이른 시일 내에 (핵무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한 발언을 겨냥한 것이다. 이란 외교부의 항의는 윤 대통령의 ‘아랍에미리트의 적은 이란’ 발언 다음날인 16일 “외교적으로 부당하며 전적으로 무지한 것”이라고 반응한 뒤 이틀 만이다.
이란 외교부의 행동에 한국 외교부도 맞초치로 대응했다. 대사 맞초치는 외교가에서 이례적인 일이다. 조현동 1차관은 19일 사이드 바담치 샤베스타리 주한 이란대사를 외교부 청사로 불렀다고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이 브리핑에서 밝혔다. 임 대변인은 “조 차관은 윤 대통령 발언은 아랍에미리트에서 임무 수행 중인 우리 장병들에 대한 격려 차원의 말이었고 한-이란 관계 등 이란의 국제관계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다시 한번 설명했다”고 전했다. 임 대변인은 이란이 제기한 ‘핵확산금지조약 위반’ 주장에 관해서는 “우리나라는 핵확산금지조약의 비확산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고 있고, 이행 의지에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외교부는 윤 대통령의 발언 파문이 커지자 당혹스러운 표정이다. 지난 17일 조현동 1차관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이란 쪽에 우리 입장을 전달했고 이란도 우리 설명을 이해한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외교부는 19일에도 “대사 맞초치는 양국 간 다양한 외교적 소통 방식의 하나일 뿐”이라며 “(윤 대통령의 발언으로) 한-이란 관계가 특히 악화됐거나 영향을 받거나 하지 않았다”며 진화에 나섰다.
외교부 내부에서는 히잡 시위 탄압으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이란 정부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70억달러 동결 자금 문제 등 한국 정부에 쌓인 불만을 드러내며 외교적 공세를 편다는 기류도 있다. 정부는 지난해 11월 유엔 총회에서 이란 인권결의안에 찬성하고, 12월에는 이란을 유엔 여성지위위원회에서 제명하는 결의에도 찬성했다.
전문가들은 윤 대통령의 발언으로 촉발된 양국 갈등이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김준형 전 국립외교원장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최악의 경우 호르무즈 사태 같은 것이 다시 한번 일어날 수 있다”며 외교부가 적극적인 설명을 해야 한다고 했다. 2021년 1월 한-이란 관계가 악화하자 이란은 앞바다인 호르무즈해협 공해상을 지나던 한국 국적 선박 ‘한국케미호’를 나포했다. 정부 당국은 이번에도 호르무즈해협을 지나는 우리 국적 선박에 대해 안전 대책을 협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김정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한·이란 의원친선협회 소속 야당 의원들은 국회에서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윤 대통령의 발언은 자칫 아랍에미리트연합과 이란 관계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이란을 적으로 여기고 있다고 오해를 불러일으켜 한-이란 간 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정부는 역지사지의 마음과 진솔한 자세로 이란 측에 충분히 해명하고 필요하다면 정중히 사과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신형철 기자
newiron@hani.co.kr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엄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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