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이 ‘조건부 종료 유예’로 기사회생한 데 대해, 정부의 그간 원칙과는 거리가 있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 청와대는 우리 쪽의 ‘지소미아 종료’ 최후통첩으로 압박감을 느낀 일본이 ‘수출규제와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 우대 국가) 재검토’를 제안해 오면서 합의가 이뤄졌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일본은 “수출규제 조치를 해소하는 방안” 협의를 재개한다고 밝혔을 뿐인데 한국은 지소미아 ‘조건부 종료 유예’와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중지라는 즉각적인 결과물을 내줬다는 ‘등가성 논란’이다. 정부는 “일본이 계속 시간을 끌 경우 한국이 언제든 지소미아를 종료시킬 수 있는” 버튼을 확보함으로써 상응 조처의 균형을 맞췄다고 밝히고 있다.
정부의 이번 결정은 남북관계가 악화되고 북-미 협상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미국의 예상을 뛰어넘은 강력한 압박 공세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지소미아 문제에서 일정하게 양보함으로써 미국의 방위비분담금 대폭 증액 압박 등 임박한 한-미 동맹 현안을 관리하려 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에서까지 밝힌 원칙을 100% 관철시키지 못함으로써 정부의 신뢰성과 정책의 일관성은 상처를 입혔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은 “형식상으로는 50 대 50의 ‘휴전’이지만, 결과적으로 외교안보 정책의 안정성과 신뢰성이 흔들린 것이 아쉽다”며 “지소미아 종료를 강행했을 경우 미국의 반발과 한국 경제의 불확실성 등을 고려한 결정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새판짜기에 나선 미국의 동북아 질서 속에서 한국의 외교적 선택이 갖는 한계도 또렷해졌다. 한국은 지소미아 종료를 일본의 보복성 수출규제 및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 우대국가) 배제에 대한 대응카드로 꺼냈지만, 미국은 이를 중국 견제를 염두에 둔 한·미·일 안보협력의 틀을 흔드는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지난 8월22일 정부의 지소미아 종료 결정 직후 “문재인 정부의 결정은 동북아에서 우리가 직면한 안보적 도전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나타낸다”는 미 국무부의 논평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의 선택과 미국의 이익이 충돌하는 구도가 드러났다.
정부가 지소미아 종료를 결정하면서 이런 안보 구도를 제대로 판단했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정부가 일본의 보복 조처를 견제하기 위해 지소미아 카드를 꺼내는 과정에서, 미국을 충분히 설득하지 못한 것이 결과적으로 큰 부담이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정부가 지소미아와 한-미 동맹을 분리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미국의 강한 압박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김숙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대외전략연구실장은 “지소미아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며 “일본이 ‘안보상’ 문제를 들어 보복성 수출규제를 했고 미국은 중재 의지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가 미·일을 움직이기 위해 ‘지소미아 종료’ 카드를 꺼낸 것은 이해할 만하지만, 그 과정에서 미국과의 충분한 협의와 외교적 준비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미국의 압박은 예상보다도 집요했다. 우리 외교부가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를 불러 공개적인 우려 표출을 자제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미국의 메시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미국은 국무부와 국방부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축으로서 한·미·일 안보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압박했다. “지소미아가 종료되면 이득을 보는 곳은 북한과 중국, 러시아”라며 지소미아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한국의 안보 이익이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안보 이익과 분리될 수 없음을 명확히 한 것이다.
미국의 이런 태도는 한국의 외교 부담을 더 무겁게 했다. 한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한·미·일 안보협력의 틀 속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 새삼 확인됐기 때문이다. 중국으로선 동북아에서 한·미·일 협력의 틀이 강화되는 것을 불쾌하게 받아들일 것이고, 북한도 독자적인 남북관계가 쉽지 않다는 판단을 할 가능성이 있다. 김숙현 연구실장은 “정부의 이번 결정은 ‘한국이 미국의 영향력 아래서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어렵다’는 신호를 준 것”이라며 “한국이 자주적 역할, 특히 한반도 문제에서 남북한의 자주적 해결 원칙을 강조했지만, 현실에서는 이를 제대로 실현하기가 쉽지 않다는 한계를 보여준 셈”이라고 지적했다.
한-미 동맹에도 보이지 않는 흠집을 남겼다. 미국은 애초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이후 한-일 갈등이 불거지고, 일본이 안보상 이유로 한국에 대한 수출까지 규제하는 상황에서도 뒷짐을 졌다. 지소미아 종료 예정일을 앞두고 분주해진 미국의 압박은 일본보다는 한국에 집중됐다. 미국의 관여는 비대칭적이었고, 불공정한 동맹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조성렬 자문연구위원은 “미국은 한·일을 대등하게 존중하지 않았다”며 “이번 지소미아 사태에서 미국의 추가 일본에 훨씬 기울어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이제 주요한 과제는 다음달 말 중국에서 열릴 것으로 예상되는 한-일 정상회담 이전까지 피해자들의 동의를 얻은 강제동원 해법과 수출규제 철회를 진전시키는 것이다. 김숙현 연구실장은 “일본과 시작하기로 한 국장급 협의를 통해 조속히 일본의 수출규제를 철회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 피해자들의 입장이 반영된 강제동원 해법을 만들어내야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유강문 선임기자, 박민희 기자
m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