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시대 동아시아 정세는 어떻게 흘러갈까. 왼쪽부터 문재인 대통령,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자,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지난 7일 미국의 저명한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표지와 뒷면의 저자소개 등을 합쳐 총 18쪽에 이르는 간략한 내용의 보고서를 공개했습니다. 한국에선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일본 언론들은 ‘2020년의 미-일 동맹-글로벌 어젠더에 대한 동등한 동맹’이란 제목이 달린 이 보고서를 ‘5차 아미티지-나이 보고서’란 별칭을 달아 주요하게 보도했습니다.
먼저, 일본 언론의 보도 내용을 볼까요. <마이니치신문>은 보고서가 나온 다음날인 8일 “바이든 행정부의 발족을 앞둔 시점에 미국의 외교·안보 전문가들이 7일 일-미 동맹에 관한 제언을 발표했다. (보고서는) 트럼프 정권 아래서 미국의 국제 지도력이 저하하는 가운데 일본이 자유무역과 다국 간 협조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등 처음으로 일본이 동맹에서 미국과 대등한 역할을 맡게 됐음을 강조했다”고 전했습니다. 한국에서 ‘극우’라 평가 받는 <산케이신문>도 같은 날 “리처드 아미티지 전 미 국무부 부장관과 조셉 나이 하버드대 특별공로교수 등 미국의 초당파 지일파 전문가들이 7일 차기 미국 정권과 스가 요시히데 일본 정부의 ‘안전보장 상의 최대 과제’인 중국과 ‘경쟁적 공존을 향해’ 일-미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고 적었습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9일 한술 더 떠 1차부터 4차까지 공개된 역대 보고서에서 실제 일본의 안보 정책에 반영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비교해 보여주는 ‘표’까지 만들어 비중 있게 보도했습니다.
이 보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조지 W 부시 행정부(공화당)에서 국무부 부장관을 지낸 아미티지와 빌 클린턴 행정부(민주당)에서 국방부 차관보를 맡았던 나이 교수 등 여야를 망라하는 저명 인사들이 △바이든 행정부 출범 △미-중 경쟁 격화라는 두 개의 큰 구조적 변화에 맞서기 위해 미-일 동맹의 강화 방안을 제언하는 보고서를 펴냈다는 사실입니다. 구체적으로 보고서는 중국의 부상이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경쟁적 공존’을 하려면 일본은 미국·영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등 영미권 5개국이 참가하는 기밀 공유 네트워크 ‘파이브 아이스’에 여섯번째 참가국이 되는 등 주변국과 안보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 미국에겐 트럼프 행정부가 탈퇴했던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시피티피피)에 재가입할 것을 권하는 등 일본과 기술·경제분야의 협력 강화를 위한 여러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보고서에 나온 여러 내용 중에 한국 입장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대목은 북한 관련 언급입니다. 보고서는 미-일 동맹에 가장 큰 안보 위협으로 중국, 두번째 위협으로 북한을 꼽으며 “25년에 걸친 성공적이지 못한 (대북)외교가 있었다. 비핵화는 여전히 장기적 목표이긴 하지만, 단기적으로(in the near term)는 비핵화가 비현실적(unrealistic)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제안하는 대안은 무엇일까요. ‘억지’입니다. 보고서는 미국이 “신선한 접근들에 문을 닫을 필요는 없지만 (대북 정책의) 최우선 순위는 북한의 새로운 능력 앞에서 억제와 방어를 강화하는 것을 통해 북한의 핵을 어떻게 가둬둘지(contain) 파악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한-미-일 삼각동맹의 강화’입니다. 보고서는 북핵을 억제하는 것이 “미-일 동맹과 한-미 동맹의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한다. 또, 미-일-한 세 나라의 정보와 방위 분야의 협력을 강화하는 것은 긴요한 일임을 강조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어, 미-일 양국이 파트너와 함께할 수 있는 협력국(coalition)을 늘려야 한다며 “북한에 대한 미-일-한 세 나라의 정책 조정은 지역 안보에 중대하다. 워싱턴과 도쿄가 이런 협력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몇몇 도전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한-일 사이에 계속되는 긴장이다. (중략) 한-일 양국 모두가 과거가 아닌 미래에 초점을 둬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미국 외교·안보 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사들이 쏟아낸 이런 제언 내용을 읽다 보니, 내년 1월 말 출범하게 되는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이 트럼프 행정부가 시도한 비핵화를 유도하기 위한 ‘적극적 관여’보다 북핵을 일단 ‘억제’하는 ’현상유지 정책’에 머물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입니다.
이 제안들을 읽다보니 자연스레 4~5년 전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주도했던 동아시아 정책이 떠오릅니다. 미국은 당시 북한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미-일 3각 동맹을 강화하는데 상당히 큰 공을 들입니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은 한-일 간 가장 큰 외교 현안이었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12·28 합의라는 타협을 이루도록 압력을 가했습니다. 양국 사이에 역사 타협이 이뤄지자 자연스럽게 한국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체결과 사드 배치 등을 받아들이는 흐름에 내몰리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미국은 ‘전략적 인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북핵 방치 전략을 유지하며 북한이 핵과 미사일 능력을 강화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합니다. 결국 북한은 2017년 11월 화성-15형 발사 성공을 통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능력을 입증하면서 전 세계에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게 됩니다. 만약 바이든 행정부의 실제 정책이 5차 아미티지-나이 보고서가 제안하는 내용으로 구체화한다면, 2차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재가동을 원하는 문재인 정부는 큰 곤경에 빠지게 될 것으로 예측됩니다.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용인 등 아미티지-나이 보고서의 내용을 적극 실행했던 아베 신조 전 총리
그런데 한 편의 보고서에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요. 아미티지와 나이가 2000년부터 공개한 앞선 네 차례 보고서가 실제 일본의 안보 정책에 상당히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2000년 10월에 나온 1차 보고서(‘성숙된 파트너십을 위해’)에서 “미국의 민주적 동맹국인 일본은 미국이 아시아에 관여할 때 열쇠가 된다”며 일본이 그동안의 헌법 제약을 해체하고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이들의 요구는 2015년 4월 미-일 가이드라인(방위협력지침) 개정과 그해 9월 일본 안보법제 제개정을 통해 그대로 관철됐습니다. 2007년 2월에 나온 2차 보고서에선 일본이 오랫 동안 유지해 온 ‘무기수출 3원칙’을 완화하고 미사일 방어(MD)를 강화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이 내용 역시 지난 아베 정권에서 실현됐습니다.
3차 보고서가 나온 2012년 8월은 일본에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 있던 이례적인 시기였습니다. 3차 보고서 ‘미일동맹-아시아 안정의 닻’에서 아미티지와 나이는 일본에 “1류 국가로 남을 것인가, 2류 국가로 만족할 것인가 중대한 국면을 맞고 있다”면서 미-일 동맹의 확대를 다시 한번 역설했습니다. 당시 요구한 주요 내용은 미-일 양국이 원자력 연구 개발을 강화하고 티피피(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교섭에 참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베 전 총리는 2012년 12월 재집권에 성공한 뒤 이 제안을 받아 들여 티피피 교섭에 적극 참가해 미국과 최종 합의를 이루게 됩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사흘째인 2017년 1월23일 티피피 탈퇴를 선언합니다. 그럼에도 일본은 좌절하지 않고 미국이 빠진 가운데서도 티피피를 시피티피피(CPTPP)로 이름을 바꿔 지금도 이 틀을 지키고 있습니다. 네 번째 보고서 ‘이전보다 더 중요한-21세기 향한 미-일 동맹의 재생’은 2018년 10월에 공개됐습니다. 이 보고서엔 미-일 연합 통합임무부대 창설, 자위대 통합 사령부 창설, 공동의 유사계획 책정 등 대담한 제안들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이 안은 미-일의 무력을 완전 일체화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쉽게 현실화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 판단합니다.
아미티지-나이 보고서와 관련해선 아주 재미 있는 일화가 남아 있습니다. 아베 전 총리는 2012년 12월 재집권한 뒤 2013년 2월 미국을 방문합니다. 그리고 2월22일 3차 아미티지-나이 보고서를 통해 “2류 국가로 만족하겠느냐”고 일본에 물었던 전략국제문제연구소에서 연설에 나섭니다.
“지난해 아미티지, 나이, 마이클 그린 등 여러 분들이 일본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물은 것은 일본이 혹시 2류 국가가 되지 않을 것이냐는 우려였습니다. 아미티지씨 대답하겠습니다. 일본은 지금도, 앞으로도 2류 국가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돌아왔습니다. 일본도 그럴 것입니다.”
아베 총리는 이후 7년 동안 아미티지-나이 보고서의 여러 제언을 받아들여 미-일 동맹을 이전보다 더 강화된 ‘글로벌 동맹’으로 발전시켰습니다. 5차 아미티지-나이 보고서를 받아들 스가 요시히데 총리는 어떤 판단을 하게 될까요. 또 그 사실이 한반도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요. 내년 1월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한 뒤 다시 한번 한반도를 둘러싸고 여러 나라들의 각축전이 시작됩니다. 멍하니 눈 감고 있다간, 정말 누가 어느새 나타나 코를 베어갈지도 모를 일입니다. 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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