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일 국회의장실에서 선거제도 개편을 논의하는 ‘2+2 협의체’가 열렸다. 왼쪽부터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야당 간사인 김영배 더불어민주당 의원, 같은 당 송기헌 원내수석부대표, 김진표 국회의장, 이양수 국민의힘 원내수석부대표, 정개특위 여당 간사인 김상훈 의원. 연합뉴스
선거 제도는 법률입니다. 법률 제정 권한은 입법부에 있습니다. 선거 제도는 입법부 구성원인 국회의원 개개인의 당락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국회의원 선거 제도를 바꾸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선거 제도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미군정은 1948년 5월10일 유엔 감시 아래 총선을 실시했습니다. 200개 선거구에서 1명씩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을 선출했습니다. 소선거구 다수대표제였습니다. 이들이 헌법을 제정하고 대통령을 뽑았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를 출범시켰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국회의원 선거 제도를 크게 손대지 않았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1963년 비례대표제를 도입했습니다. 정국 안정을 명분으로 의석 배분을 집권 공화당에 유리하도록 했습니다. 1972년 유신 헌법으로 중선거구제를 도입했습니다. 국회의원 정수 3분의 1을 사실상 대통령이 임명했습니다. 유신정우회(유정회)입니다.
전두환 정권은 중선거구제를 유지했습니다. 전국구 의석 배분은 집권 민주정의당에 유리하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쿠데타로 집권한 독재자들은 국회의원 선거 제도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마음대로 주물렀습니다. 국회를 국민의 대표 기관이 아니라 통치의 도구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의미 있는 변화는 1987년 6월 항쟁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 뒤에 이뤄졌습니다. 1988년 4·26 총선을 앞두고 민정당 총재였던 노태우 대통령,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가 소선거구제로 뜻을 모았습니다.
야당은 전국구 분배와 부재자 투표 방식 개선을 요구했습니다. 민정당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988년 3월8일 새벽 장성만 국회부의장이 국회의원선거법을 날치기 통과시켰습니다.
국회의원선거법은 1994년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으로 통합됐습니다. 2005년에는 공직선거법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1988년에 결정된 큰 틀이 지금까지 35년 동안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 유권자와 국회의원들이 현행 제도를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입니다.
지금 어느 정당에도 1988년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총재와 같은 리더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직선거법은 국회의원 선거 1년 전에 선거구를 획정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선거법에 별표로 붙은 ‘국회의원 지역 선거구 구역표’가 그것입니다. 행정구역 변화와 인구 변동 등을 고려해 선거구를 매번 조정해야 선거를 치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1년 전에 선거구를 획정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1년은 고사하고 선거를 한두달 코앞에 두고 선거구 획정이 겨우 이뤄졌습니다. 매번 그랬습니다. 이건 또 왜 그럴까요?
첫째, 현직 국회의원들에게 선거구 획정이 그리 절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직 국회의원들은 인지도가 앞서는 기득권자들입니다. 선거구 획정을 늦게 할수록 상대적으로 유리합니다.
둘째,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하려면 각 정당 내부에 강력한 리더십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국회에서 선거법 개정 작업이 좀처럼 진전되지 않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국회의원 300명 중에서 선거법 개정에 가장 적극적인 사람은 아마도 김진표 국회의장일 것입니다.
김 의장은 선거법 개정 및 개헌을 통한 국민통합을 정치 인생의 마지막 소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올해 제헌절 경축사에서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지난 시간, 우리 국회는 선거 제도 개편을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국회의원 144명이 정당을 초월해 ‘초당적 정치개혁 의원모임’을 만들었고, 19년 만에 전원위원회를 열어 열띤 토론도 벌였습니다. 선거제 개편을 위한 국민 공론조사도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승자 독식과 극한 대립의 선거 제도를 수정해야 한다는 폭넓은 공감도 이뤄냈습니다.”
김 의장의 강한 권고로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원내수석부대표(이양수·송기헌)와 정치개혁특별위원회 간사(김상훈·김영배) 등 4명이 참여하는 ‘2+2 협의체’를 구성했습니다.
그러나 협상은 더디기만 합니다. 최근에야 협상팀이 각각 당 지도부에 기초적인 보고를 마쳤습니다. 다음주부터는 각 정당의 협상 전략을 내부적으로 논의할 것 같습니다.
김진표 국회의장이 7월4일 오전 국회 사랑재에서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선거법 협상의 쟁점이 뭘까요? 현행 국회의원 선거 제도는 ‘소선거구제+준연동형’입니다. 2020년 21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과 정의당 등이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 처리했습니다. 위성정당 출현으로 연동 효과가 사라졌습니다. 손질이 불가피합니다.
국민의힘은 20대 이전의 ‘소선거구제+병립형’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합니다. 민주당은 ‘소선거구제+권역별 준연동형’을 주장합니다. 양쪽의 주장을 절충하면 비례대표 의석을 현행 47석에서 60석 정도로 늘려서 ‘소선거구제+권역별 병립형’을 도입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문제는 비례대표 의석을 늘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김 의장은 서울 등 대도시에 4명씩 선출하는 중대선거구제를 부분적으로 도입해 지역구 의석을 줄이고 비례대표 의석을 확보하는 방안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지역구 축소 및 비례대표 증원에 반대하는 국민의힘 지도부와 영남 의원들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서울 등 대도시의 민주당 현역 의원들이 선거구제 변화를 받아들일지도 의문입니다. 결국 여야 지도부의 리더십으로 돌파할 수밖에 없습니다.
잘될까요? 어렵습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 이재명 민주당 대표 등 여야 지도부는 선거 제도 개혁과 국민통합보다는 내년 총선 승리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의원들도 각자 내년 총선에서 과연 자신이 당선될 수 있느냐에 더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8월 말을 넘기면 정기국회가 열리는 9월부터는 대정부질문, 국정감사, 예산안 심의 등으로 선거법 협상이 어렵습니다. 따라서 지금 분위기라면 여야가 서로 양보안을 내지 않고 버티는 ‘치킨 게임’만 하다가 해를 넘긴 뒤 총선 직전에 졸속으로 타협하는 구태를 되풀이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유남석 헌법재판소장과 헌법재판관들이 7월25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이태원 참사 부실 대응 관련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탄핵심판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선거법 협상 앞에는 중대한 변수가 하나 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선거법 위헌 결정 및 총선 무효 가능성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2014년 10월 “공직선거법 별표 ‘국회의원 지역 선거구 구역표’에서 인구 편차 33%를 넘어서는 선거구는 이 지역 유권자의 선거권과 평등권을 침해한다”며 “2015년 12월31일까지 법을 개정하라”고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국회는 2015년을 넘겨 2016년 3월2일에야 선거구를 획정했습니다. 후보자와 유권자 여럿이 ‘입법 부작위에 의한 위헌’이라며 국회를 상대로 헌법소원 심판을 제기했습니다.
총선이 끝난 뒤인 2016년 4월28일에 심판 결과가 나왔습니다. 헌법재판소는 “피청구인(국회)은 선거구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야 할 헌법상 입법 의무의 이행을 지체했다”면서도 “헌법소원 심판 청구는 심판 청구 당시는 물론 결정 당시에도 권리 보호 이익이 존재해야 하는데 선거구 획정으로 권리 보호 이익이 없어졌다”며 각하 결정을 내렸습니다.
당시 헌법재판관은 박한철·이정미·김이수·이진성·김창종·안창호·강일원·서기석·조용호 9명이었습니다. 박한철·김이수·이진성·김창종·강일원 5명이 다수 의견을 형성했습니다. 하지만 이정미·안창호·서기석·조용호 4명은 “피청구인의 입법부작위는 입법 재량의 한계를 넘는 입법 의무 불이행으로서 20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고자 하는 자 등의 선거 운동의 자유 및 선거권자의 선거권 등을 침해한다”고 반대 의견을 냈습니다. 선거법은 위헌이라는 뜻입니다. 이 선거법에 의해 치러진 20대 총선은 무효라는 의미입니다.
헌법재판소는 9명의 재판관 가운데 6명 이상의 찬성으로 인용 결정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2016년에는 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이 4명이었기 때문에 인용 결정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7월 선거일 180일 전부터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펼침막 및 광고물 게시를 금지하고 처벌하는 공직선거법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고 올해 7월31일까지 법을 개정하라고 시한을 정했습니다. 국회는 이번에도 시한을 넘겼습니다.
누군가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하고 이번에는 6명의 재판관이 2016년 4명의 재판관과 같은 의견을 낸다면 어떻게 될까요? 선거법은 위헌이 됩니다. 위헌인 선거법에 의해 치르는 22대 총선은 무효가 됩니다.
22대 총선이 무효가 되면 21대 국회의원들의 임기가 끝나는 2024년 5월29일을 끝으로 대한민국 국회가 없어지게 됩니다. 헌법이 국회의원의 임기를 4년으로 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예측은 극단적인 가정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사법부가 입법부의 존립을 부정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알 수 없습니다. 언제나 상상 그 이상의 일이 벌어지는 곳이 대한민국입니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여야가 하루속히 선거법 협상을 마무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여야 지도부와 의원들의 각성과 성찰을 촉구합니다.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