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에게 사퇴를 요구한 지 이틀 만에 “열차로 같이 (서울로) 가자”며 손을 내밀었다. 한 위원장은 “대통령님에게 깊은 존중과 신뢰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화답했다. 급작스러운 사퇴 압박에 이어진 대통령실과 친윤석열계의 말폭탄, 사전 절차 없는 화해 장면 연출까지 2박3일은 명쾌한 구석이 별로 없는 ‘급발진 미스터리 드라마’지만, 총선을 앞두고 여권의 자멸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작용한 건 분명해 보인다.
파국으로 치닫는 듯했던 두 사람의 만남은 갑자기 이뤄졌다. 국민의힘이 먼저, 한 위원장이 이날 계획했던 당 사무처 순방 일정을 미루고 오후에 충남 서천특화시장 화재 사고 현장을 방문한다고 오전 9시40분께 공지했다. 약 2시간 뒤 대통령실도 윤 대통령이 사고 현장을 방문한다고 밝혔다. 전후 사정을 잘 아는 여권 핵심 관계자는 한겨레에 “현장에 온다고 먼저 연락한 건 대통령실이지만, 윤 대통령이 한 위원장을 만나려고 시간을 맞췄다”며 윤 대통령이 만남에 적극적이었다고 설명했다. 결국 두 사람은 이관섭 대통령 비서실장이 한 위원장을 만나 사퇴를 요구한 지 이틀 만인 이날 오후 1시40분께 화재 현장에서 만났다.
대통령실과 친윤계에서 “한 위원장과 더는 같이하기 어렵다”는 말이 나오는 등 파국까지 예상됐던 두 사람이 이날 아무 일 없었던 듯 갈등 봉합에 나선 것은 70여일 앞으로 다가온 총선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당 지도부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김 여사 문제로 20년 지기인 한 위원장을 내치는 모습이 총선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여론이 좋지 않으니, 일단 극단으로는 가지 말자는 메시지로 읽힌다”고 짚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우리 지지층들은 집안싸움 자체를 싫어한다. 두 사람의 갈등이 지속되면 총선을 앞두고 공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이 확전을 벌일 경우 명분도, 실익도 없다는 점도 부담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으로선 툭하면 법적 근거 없이 당무에 개입한다는 논란에 시달려야 하고, 아직 당내 기반이 탄탄하지 않은 한 위원장으로선 집권 3년차 대통령과 맞서는 여당 대표로 불안한 처지가 되는 탓이다.
여권에선 이번 일로 ‘수직적 당-대통령실 관계’ 이미지는 털어낼 수 있을 거란 기대도 나온다. 대통령실에선 “대통령실과 여당의 관계 재정립을 위한 첫걸음”, “윤 대통령은 윤 대통령의 길을 가고, 한동훈은 한동훈의 길을 가는 것으로 정리된 분위기”라는 반응이 나왔다.
윤 대통령 쪽에서 보면, 20년 넘은 최측근인 한 위원장조차도 ‘김 여사 문제는 건드려선 안 되는 역린’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여권 내부에서 김 여사 명품 가방 수수 의혹 관련 사과 등의 요구를 당분간이나마 억누르는 효과도 거둔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실과 여권 핵심은 김 여사가 ‘몰카 공작의 피해자’고, 사과를 하면 야당에 공격의 빌미를 준다고 보고 있다.
한 위원장으로선 이런 혼란 속에서도 ‘여권 내 2인자’임을 과시한 것이 득일 수 있다. 한 위원장이 ‘고난’을 거쳐 윤 대통령의 신뢰를 다시 회복한다면, 앞으로 본격화할 공천 국면에서 더욱 당 장악력이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를 뒤집어보면, 고스란히 두 사람의 숙제가 된다. 여권 내 가장 큰 리스크 가운데 하나인 김 여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두 사람이 지도력을 제대로 발휘하는 것도, 당-대통령실 관계를 건강하게 이끄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국민의힘 한 초선 의원은 “두 사람의 정면충돌로 한동훈 위원장이 당장은 ‘윤석열 아바타’ 이미지를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김 여사 문제를 어떻게 정리하지 못하면 본인도 남는 게 별로 없었던 싸움”이라고 말했다. 특히 “여당과 대통령은 수직적이니 수평적이라는 얘기가 나올 부분이 아니다. 상호 협력하는 동반자 관계”(지난달 26일)라는 한 위원장의 인식이 변하지 않는 한, 양쪽의 관계 재정립은 쉽지 않아 보인다.
신속히 진정 국면으로 가는 상황이 석연치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여권 내홍을 ‘약속대련’이라고 주장해온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이날 에스비에스(SBS) 인터뷰에서 “국민들이 볼 때 둘이 싸우기도 하네, 한 위원장이 이기는 모양새도 있네, (이렇게 되면) 상하관계라는 걸 불식시키고 총선에 유리할 것”이라며 “(결국 두 사람의) 주전장은 공천관리위원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배지현 기자 beep@hani.co.kr 서영지 기자 yj@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