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오후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받고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을 나서는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 박종식 기자 anaki@ahni.co.kr
[토요판] 다음주의 질문
“김용판, 1심 무죄 선고. 풉!!”
그제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재판장 이범균)가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직후 트위터로 퍼진 반응 가운데 하나다. 판결문을 보면 그런 조소를 받을 만도 하다.
판결은 김 전 청장이 저지른 핵심 범죄사실에 대한 판단을 빠뜨렸다. 법률용어로는 판단유탈이다. 그의 핵심 혐의는 ‘하필이면 선거 직전, 대통령후보 토론에서 이 문제로 격론이 벌어진 지 한 시간 뒤인 12월16일 밤 11시에’, ‘수사 결과도 아닌 컴퓨터 분석 결과’만을 근거로, 그것도 ‘본격 수사의 중요한 단서가 나왔는데도’, ‘혐의사실 내용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허위 발표’를 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판결은 이 혐의에 대해,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하는 데 그쳤다. 그가 중요 단서의 발견을 보고받은 사실, 분석 결과를 담당 수서경찰서엔 알리지 말라고 지시한 사실, 언론 발표를 지시한 사실까지 다 인정하면서도 그랬다.
왜 그랬을까. 판결은 당시 발표가 민감한 선거 시기에 적절한 것이었는지, 발표 내용이 허위인지 등에 대한 판단을 전혀 하지 않았다. 선거 개입, 즉 범죄의 의도를 판정하려면 왜 무리하게도 그 시점을 정해 그런 발표를 하도록 했는지가 해명돼야 하는데, 법원은 바로 그 대목에서 발을 멈추고 입을 닫았다. 법원은 대신 “피고인에겐 잘못된 수사결과라는 인식이 없었다… 범죄의 의도를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김 전 청장의 내심을 대신 들여다보고, 대신 변명해주었다. 한 발짝만 더 가면 선거법 위반의 범죄 구성 요건이 갖춰지는데도, 짐짓 외면했다.
판결은 대신 변죽만 한참 건드린다. 108쪽에 이르는 판결문에서 핵심 범죄사실과 관련된 대목에 대한 서술은 고작 4~5쪽이다. 나머지 상당 부분은 경찰 수뇌부의 수사 은폐·축소를 폭로한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의 진술을 배척하는 것으로 채워졌다. 배척의 주요 논거는, 피의자일 수도 있었던 다른 경찰관 17명의 진술과 다르다는 것이다. 다수결로 정하자는 꼴이니, 판결이라기엔 민망하다. 결론을 먼저 정해놓고 맞추려다 보니 그랬을 수 있다.
이런 낯뜨거운 판결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혹시, ‘큰일’이 벌어질까 걱정한 때문은 아닐까. 허위발표로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는 혐의에 유죄가 인정되면 선거의 공정성과 정권의 정당성까지 의심받게 돼 큰 소동이 벌어진다는 걱정을 누군가는 했을 법하다. 그 ‘누군가’가 법원 자신일 수 있다. “사법의 종국적 사명은 재판에 의해 당면한 분쟁을 해소…함으로써 안정되고 평화로운 사회를 지키는 데 있다”(양승태 대법원장, 지난해 12월6일 전국법원장회의)는 생각에서 그런 걱정을 했을 수 있다. 설령 그렇더라도 원칙과 설득력은 갖췄어야 했다.
그런 걱정을 하는 ‘누군가’를 법원이 의식한 게 이번 결과라면 얘기가 좀 다르다. 법원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재판의 독립을 포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용기 없는 법원과 법관을 국민이 신뢰할 리 없고, 신뢰를 잃으면 “재판 결과에 모두 승복하고 이를 출발점으로 삼아 새로운 질서를 쌓아가”는 일도 불가능하다. 되레 의심과 불신, 분란만 키울 뿐이다. 대통령의 걱정이 있은 지 몇 달 안 돼 내려진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통상임금 판결이 바로 그런 예다.
앞으로도 권력이 ‘걱정’하는 사건은 잇따를 것이다. 당장 국정원 댓글 선거개입 사건 재판이 계속된다. 이번에도 신뢰는커녕 비웃음만 살 것인지 궁금하다. 다음주에는 김승연 한화 회장의 배임·횡령 사건의 파기환송심과 구자원 엘아이지그룹 회장의 사기성 기업어음 발행 사건 선고도 있다. 경제민주화를 앞다퉈 내세우던 때와 달리 지금은 대통령부터 그런 공약은 내팽개친 채 경제살리기를 걱정한다. 바람 방향이 바뀌었으니, 재벌 범죄에 중형을 선고하던 법원도 바뀔까. 그나마 쌍용차 해고무효 판결 등 바람 속에서도 ‘바람보다 더 먼저 일어나는’ 판결들이 반갑다.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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