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겸의 우충좌돌 (22)
영화 <달콤한 인생>으로 본 박근혜 대통령의 심리
<달콤한 인생>에도 영향을 끼쳤을 게 분명한 영화 <대부>에 나오는 대사 한마디가 떠오른다. “정치와 범죄의 본질은 같아. 다만 정치는 방아쇠를 언제 당길지 아는 것이지.”
영화 <달콤한 인생>으로 본 박근혜 대통령의 심리
<달콤한 인생>에도 영향을 끼쳤을 게 분명한 영화 <대부>에 나오는 대사 한마디가 떠오른다. “정치와 범죄의 본질은 같아. 다만 정치는 방아쇠를 언제 당길지 아는 것이지.”
박근혜 대통령과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 사이의 ‘전쟁’을 지켜보자니 “어디서 한번 본 듯한데…”라는 느낌이 자꾸만 끼어들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10년 전 영화 <달콤한 인생>이다. 특히 영화의 명대사로 꼽히는 “넌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가 기시감을 부채질한 거다. 대개의 누아르 영화는 이권이나 영역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암투와 배신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 흐르는 감정을 다룬다. 조직의 두목과 2인자 사이의 사소한 감정 대립이 극단으로 치닫는 과정을 카메라는 담았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은 모욕이 아니라 배신을 말했다. 그리고 모두들 배신이라는 틀로 문제를 바라보고 해석한다. 그러니 당연히 유승민은 가해자가 되고, 박근혜는 피해자가 된다. 하지만 모욕이라면 시나리오가 달라진다. 배신감은 믿음이나 의리를 저버린다는 가해자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는 개념이다. 하지만 모욕감은 원인 제공자의 의도가 중요하지 않다. 받아들이는 사람의 심리상태가 결정적이다. 특히 자존감이 훼손된 상태에서는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비수처럼 가슴을 후벼파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10년만에 <달콤한 인생>을 다시 찾아봤다. 유튜브에 들어가보니 공짜다. 얼마나 달콤한 세상인가.
#1 상호신뢰 - 두목은 사심없는 부하가 마음에 든다
범죄 조직의 두목(김영철·사진)은 부하(이병헌·사진)를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냉철하고 명민한데다 과묵해 일처리에 빈틈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날 두목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부하에게 부탁을 하나 한다. 젊은 애인(신민아·사진)이 하나 있는데 그녀에게 딴 남자가 생긴 것 같다. 감시를 해보다가 사실이면 처리하라는 거다. 그리고 두목은 부하의 등을 두드리며 이렇게 말한다. “너 애인 있어? 사랑해 본 적 있어? 없어. 넌 없어. 그래서 이런 일을 너한테 시키는 거야, 그래서 널 좋아하는 거야 임마”
당 대표 시절 박근혜는 유승민을 믿었다. 비서실장으로 가까이 두고 썼다. 이른바 문고리 3인방도 그때는 유승민의 지휘를 받았다.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때는 캠프의 핵심적인 자리를 맡겼으니 유승민은 감히 누가 넘볼 수 없는 최측근이었다. 성격이 깔끔하고 일솜씨가 완벽하니 신뢰했을 것이다. 특히 사심이 없어 보이는 유승민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다들 ‘자기 정치’를 하느라고 보스의 이익을 소홀히 하는 게 정치판의 생리인데, 유승민은 예외로 보였을 법하다. 사랑을 모르는 부하이니 자기 애인을 믿고 맡길 수 있다고 판단한 두목처럼, 박근혜도 사심없는 유승민한테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게다.
#2 억울한 부하 - “당신 밑에서 개처럼 일해온 나를…왜”
부하는 두목의 여자를 감시하다 낯선 설레임에 빠져든다. 여자가 춤을 추고 첼로를 켜는 모습을 훔쳐보며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그래서 여자가 다른 젊은 남자를 만나는 장면을 잡아내고도 두 사람을 놓아준다. 하지만 부하는 자신을 휘몰아친 감정의 실체를 정확히 모른다. 그래서 두목이 “왜 그랬냐”고 추궁하는데도 제대로 답을 못한다. 겨우 한 대답이란 게 “두 사람이 만나지 않겠다고 한 약속만 지켜준다면 모든 게 다 잘 될거라고…”다. 진심이었을 거다. 약속대로만 된다면 두목의 의심은 풀리고 여자는 안전해진다. 그리고 자신도 다시 마음의 평온을 찾는다.
부하는 오히려 두목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렇게 절규한다. “저 진짜 죽일려고 그랬습니까? 7년 동안 당신 밑에서 개처럼 일해온 나를. 무슨 말이든지 좀 해봐.”
유승민도 마음이 흔들린 듯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가리키는 길이 맞는지 회의를 품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4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속마음을 드러냈다. “어제의 새누리당이 경제성장과 자유시장 경제에 치우친 정당이었다면, 내일의 새누리당은 성장과 복지의 균형발전을 추구하는 정당이 되겠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높이 평가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을 배신하겠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시대의 요청에 따라 보수도 혁신해야 하고 그 길만이 새누리당이 정권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국회법 개정도 공무원연금이라는,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개혁안을 얻어내기 위한 협상카드였을 뿐이다. 자신의 선택으로 새누리당도 대통령도 그리고 자신도 좋아질 거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니 유승민도 대통령의 노여움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는 사과를 하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지난 4개월 남짓한 기간에 두 차례 총리 인준 동의안 처리, 경제·민생 관련 법안 처리, 김영란법 등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영화 속 이병헌이 “7년 동안 당신 밑에서 개처럼 일해온 나를…”이라고 외치는 대목과 겹쳐보인다.
#3 상처받은 두목 - 노화는 가속화되고, 인내심은 바닥나고
두목은 모욕감 때문에 부하를 죽이려고 했다고 말한다. 10년 전 영화를 볼 때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정서였다. 자기의 여자를 건드린 것도 아니고 그저 봄바람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을 뿐인데 가장 아끼던 부하를 그리 쉽게 제거하려 하다니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두목의 나이쯤 되어 영화를 다시 보니 조금은 달리 보인다. 특히 두목이 이별을 통보하는 애인을 향해 “나이가 들면 말이야. 점점 인내심이 부족해져”라고 말하는 대목은 많은 부분을 설명해준다.
문제는 젊음 그 자체다. 두목은 젊은 여자를 사랑하나 여자를 잡아두기에는 나이가 들었다. 그저 집과 선물로 애정을 물물 교환할 뿐이다. 애인은 이미 젊은 남자를 몰래 만나고 있고, 믿었던 부하마저 연정을 품는다. 나이 든 이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젊은이의 특권이다. 젊고 잘생긴 데다 유능하기까지 한 부하는 자신의 노화와 추레함을 부각시킨다. 존재 자체로 상처를 준다. 게다가 자신은 배신한 여인을 처치하라고 했는데, 부하는 여자에게 관용을 베푼다. 자신의 옹졸함만 더욱 두드러질 뿐이다. 부하가 배신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두목은 이미 모욕감을 느낄 준비가 충분히 돼 있었던 것이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때를 잘못 골랐다. 박근혜 대통령의 별명이 선거의 여왕이다. 국민의 지지와 애정은 대통령의 존립 근거이고 모든 영광의 출발점이다. 그런데 메르스 때문에 지지도는 바닥을 기고 있다. 잠시지만 30%의 방어선마저 무너졌다. 다들 자신을 향해 무능한 대통령이라고 손가락질한다. 자존감이 무너졌을 때는 모든 게 원망스러운 법이다. 지금이 그때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최악의 상태에서 그것도 대통령의 가장 아픈 부분을 건드렸다. ‘세월호’다. 콘크리트라던 자신의 지지율에 쫙 금을 내고 냉혹한 대통령의 이미지를 씌운 게 세월호다. 그런데 유승민이 세월호의 악령을 되살리는 국회법 개정을 무신경하게 합의해준 거다. 국회법 개정이 위헌이냐 합헌이냐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대통령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그 무심함이다.
이번 한번이 아니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30% 이하로 내려간 적이 또 한번 있었다. 올 1~2월 연말정산 파동 때다. 그런데 유승민은 바로 그때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통해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고 지적한다. 가장 민감한 세금 문제를 가장 어려울 때 정면으로 치받은 꼴이다. 말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가 다 모멸감을 주는 것들뿐이다. 그 모욕감을 견뎌내기에는 인내심이 부족해지고 있다. 대통령 임기는 벌써 반환점을 돌고 있다. 정치적 노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4 태도의 문제 - 쉽게 끝낼 일을 키운 건 ‘어떤 뻣뻣함’
두목이 다짜고짜 죽이려고 했던 건 아니다. 기회를 줬다. 그것도 여러번. 영화에서는 두목이 꽤 길게 독백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더 큰 조직의 보스에게 부하 이병헌을 제거해달라고 부탁하면서 하는 말이다.
“꽤 똑똑한 친구가 제 밑에서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에게 심부름을 하나 시켰는데 사소하게 생각했던지 실수를 저질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대단한 실수도 아니고 가볍게 야단치고 끝날 일이었죠. 그런데 그 친구 분위기가 이상한 거예요.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거죠. 아닐 수도 있어요. 내 착오일 수도 있는 거죠. 근데 조직이란 게 뭡니까? 가족이라는 게 뭡니까? 오야가 누군가에게 실수했다고 하면 실수한 적이 없어도 실수한 사람이 나와야 되는 거죠. 간단하게 끝날 일인데 그 친구 손목 하나가 날라갔어요. 잘 나가던 한 친구의 인생이 하루 아침에 끝장이 났습니다. 이번 일은 손가락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원조 친박’으로 분류되던 유승민 원내대표가 박근혜 대통령과 관계가 멀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유승민 의원이 박근혜 비대위원장 체제로 치러진 2012년 19대 총선 당시 새누리당으로의 당명 개정을 강하게 반대했고, 복지와 분배 강화를 요구하는 개혁 성향 목소리를 선명하게 내면서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을 것이란 추측이 나오는 정도다. 아마 첫 균열은 그보다 훨씬 일찍, 아주 사소한 데서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뒤다. 바닥에서 잡초처럼 자라며 눈칫밥을 먹어본 사람이면 보스의 불편한 심기를 알아차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냉큼 달려가 머리를 조아리며 마음을 풀어줬을 것이다. 하지만 대구의 명문 가문에서 자라 최고의 학부를 나온 유승민은 그런 유전자가 없다. 아마도 적잖은 옛 친박 동료들이 가서 수그리라고 충고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뻣뻣함은 대통령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했고, 간단하게 끝낼 일을 키우고야 말았다.
#5 냉혹한 경쟁 - 보스의 지시가 떨어지자 충성 경쟁이 시작된다
두목의 제거 명령이 떨어지자 이병헌과 경쟁 관계였던 문 실장(김뢰하)은 신이 났다. 이병헌을 묶어 놓고 이렇게 말한다. “이 바닥 원래 이런 거 아냐? 누구 원망하지 마라. 우습다. 정말 세상이란 게. 가만 보면 인간이란 게 아무 것도 아냐.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잖아.” 아무런 연민도 망설임도 없다. 아니 오히려 그동안 자신이 이병헌에게 당했던 수모를 한꺼번에 되갚아 주기라도 하려는 듯 최대한 잔인하게 다룬다. 하루 전까지 같이 밥 먹고 술 마시던 사이인데, 해머로 손목을 내리치고, 구덩이를 파고 묻는다.
새누리당 내 경쟁자들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대통령의 의중이 분명해지자 최고위원들을 비롯해 이른바 친박 의원들은 벌떼처럼 달려든다. 국회법을 개정할 때만 해도 반대하는 의원이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 보스의 지시가 떨어지자 충성 경쟁을 벌인다. 어느 재선 의원은 “청와대 생각을 따르는 사람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유 원내대표를 사퇴시키겠다는 생각”이라며 “대통령 요구는 쉽게 말해 유 원내대표가 ‘배신자’나 다름없으니 원내대표에서 물러나는 것뿐 아니고 정치를 아예 그만두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달콤한 인생>에도 영향을 끼쳤을 게 분명한 영화 <대부>에 나오는 대사 한마디가 떠오른다. “정치와 범죄의 본질은 같아. 다만 정치는 방아쇠를 언제 당길지 아는 것이지.” 마피아와 결탁한 어느 정치인이 정치가 범죄조직보다는 한수 위임을 자랑하며 한 말이다.
#6 씁쓸한 결말 - 상생의 정치, 너무 달콤해서 슬픈 꿈
영화 속 이병헌은 옛 소련의 KGB가 쓰던 권총을 구해 복수에 나선다. 그리고 끝내 두목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하지만 유승민에게는 그런 무기가 없다. 처음 얼마 동안은 몇몇 동료 의원들이 보호해주겠지만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지역구도 대통령의 아성인 대구이니 대통령이 마음을 돌리지 않는 한 어려울 것이다. 영화와 현실의 차이다. 영화는 이병헌의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대사를 읊으며 막을 내린다.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은 기이히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히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 정치에서 꾼 유승민의 꿈도 너무 달콤했던 게 아닐까? 교섭단체 연설에서 밝혔던 개혁적이고 합리적인 보수의 길. 야당과 대화와 타협으로 공무원연금 개혁안을 통과시키며 꿈꿨던 상생의 정치. 그 모든 것들은 이루어 질 수 없는 꿈들인데, 너무 달콤한 꿈을 꾸었던 건 아닐까?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영화 ‘달콤한 인생’의 한 장면.
지난 2005년 국회 예결위회의장에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와 유승민 비서실장(사진 오른쪽)이 의견을 나누고 있다. 이종찬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회와 여야를 비판하며 굳은 표정으로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 행사 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25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를 마치고 나와 거취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사퇴 요구는) 더 잘하라는 채찍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한 뒤 원내대표실로 향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영화 ‘달콤한 인생’의 한 장면.
그 모습을 본 스승은 기이히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히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 정치에서 꾼 유승민의 꿈도 너무 달콤했던 게 아닐까? 교섭단체 연설에서 밝혔던 개혁적이고 합리적인 보수의 길. 야당과 대화와 타협으로 공무원연금 개혁안을 통과시키며 꿈꿨던 상생의 정치. 그 모든 것들은 이루어 질 수 없는 꿈들인데, 너무 달콤한 꿈을 꾸었던 건 아닐까?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