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25일 오후 국회에서 의원총회를 마치고 나오며 거취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사퇴요구는) 더 잘하란 채찍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답한 뒤 자리를 떠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26
언제나 상상 그 이상…박 대통령의 강경 발언
“혹시나….”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기 하루 전 한겨레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내일 국무회의에서 거부권 행사를 안하면 어떻게 될까?”
“순식간에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정국 주도권을 쥘 수 있겠지.”
“지금 청와대 참모들과 새누리당 친박 의원들이 거부권 행사를 외치고 다니는 것이 혹시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사전 공작 아닐까?”
“에이 그럴 리가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기 확신이 서면 정치적 계산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도 만약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법안을 받아들이면 어떻게 보도해야 할까.”
“그야 당연히 1면 톱과 종합면 해설 기사로 박근혜 대통령의 결단과 변화를 긍정적으로 다뤄야 한다. 칭찬에 인색하면 안된다. 그런데 그럴 일이 있을까?”
‘혹시나’는 기자들만의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여당 당직자나 보좌관들 중에서도 그런 관측을 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어느 보좌관이 했던 이야기입니다.
“지금 메르스에 가뭄에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이 곤두박질치고 있다. 거부권 행사 반대 여론이 찬성보다 높다. 그런데 청와대에서는 거부권 행사를 당연한 결정이라고 흘리고 있다. 그동안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내릴 결정에 대해 저렇게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뭔가 있지 않을까?”
“박근혜 대통령이 ‘메르스로 상황이 이만저만하고 더 이상의 혼란은 안된다. 대승적 차원에서 국회법 수정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문제가 되면 추후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하겠다’고 하면 여론은 팍 돌아설 수밖에 없다. 메르스로 수세에 몰린 국면을 전환시키면서 정국 주도권을 잡는 수다. 청와대에서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거부권 예측, 혹시나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혹시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결과는 ‘역시나’였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방향을 정하는 데 있어서는 예측이 가능한 정치인입니다. 다만 발언과 행동의 수위는 언제나 국민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25일 오전 9시 박근혜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 몇 대목을 살펴보겠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아이보리색 상의와 녹색 바지 정장을 입었습니다. 국회법 부분에서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컸다고 합니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치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고 국민을 위한 일에 앞장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과거 정부에서도 통과시키지 못한 개정안을 다시 시도하는 저의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국회법 개정안의 위헌성 문제가 커지자 법안을 수정하면서 요구를 요청으로 한 단어만 바꿨는데, 요청과 요구는 사실 국회법 등에서 같은 내용으로 혼용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국회에서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정부를 도와줄 수 있는 여당에서조차 그것을 관철시키지 못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국회법 개정안으로 행정업무마저 마비시키는 것은 국가의 위기를 자초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거부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정치권이 국민을 위해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권의 존재의 이유는 본인들의 정치생명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둬야함에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당의 원내사령탑도 정부 여당의 경제살리기에 어떤 국회의 협조를 구했는지 의문이 가는 부분입니다.”
“이제 우리 정치는 국민을 중심에 두는 새로운 정치를 하는 정치인들만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정치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국민들뿐이고, 국민들께서 선거에서 잘 선택해 주셔야 새로운 정치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회와 여야를 비판하며 굳은 표정으로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 행사 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정치적으로 선거 수단으로 삼아서 당선된 후에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결국 패권주의와 줄 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으로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께서 심판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을 쉽게 해석하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나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고 있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당리당략에 따라 정치를 하고 있다. 여당 원내대표가 정부의 경제 살리기에 협조하지 않는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신뢰를 어겼다. 배신자다. 선거에서 심판해야 한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발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부모 자식 사이에, 또 부부끼리도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하고 사는 게 세상입니다. 하물며 공직자의 공적 발언에는 금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국무회의 석상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퍼붓듯이 쏟아냈습니다. 유승민 원내대표에 대한 사적 감정까지 고스란히 드러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요?
“배신자” “심판” 사적 감정 다 쏟아낸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은 새누리당을 향해 던진 ‘폭탄’이었습니다. 폭탄을 맞은 새누리당 의원들은 의원간담회, 의원총회를 잇달아 열었습니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박근혜 대통령의 강경 발언에 다들 위축된 탓인지 의원총회 분위기는 차분했다고 합니다.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서는 재의에 부치자는 의견보다는 재의에 부치지 말고 자동폐기 시키자는 의견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유승민 원내대표 책임론에 대해서는 이장우 의원과 김태흠 의원 정도가 사퇴를 요구했고 유승민 원내대표가 사과를 하든지 아예 책임을 묻지 말자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의원총회 마무리 발언에서 “사퇴 요구는 더 잘하라는 채찍으로 알겠다”고 밝혔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노골적인 ‘찍어내기’ 공격에 일단 ‘머리 숙이기’로 버텨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결정은 새누리당 의원 다수의 뜻을 받아들인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은 새누리당의 많은 의원들이 며칠 전부터 유승민 원내대표에게 “박근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더라도 원내대표직을 사퇴하지 말고 버티라”고 주문했습니다. “언젠가 큰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그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조언이나, “내년 총선 승리를 위해 우리에게는 당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호소도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유승민 원내대표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머리 숙이는 것을 보고 실망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국회를 출입하는 젊은 기자들입니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평소 젊은 기자들에게 꽤 인기가 있는 정치인입니다. 새누리당에서는 많지 않은 ‘개혁적 보수’ 성향의 정책노선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기자들에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고 언론사를 차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유승민 원내대표의 발언이 전해지자 기자들의 대체적인 반응은 “유승민답지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이제 유승민 원내대표가 내년 총선까지 정치적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된 것일까요?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국무회의 발언을 살펴보면 박근혜 대통령은 유승민 원내대표를 쫓아내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갖고 있습니다. 특히 유승민 원내대표를 불신하는 이유를 국회 차원에서 경제 살리기 법안 처리에 협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확실히 밝혔습니다.
국회법 개정안 파동으로 당분간 야당은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에 협조하지 않을 것입니다. 국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 의원들은 또 그걸 명분으로 유승민 원내대표를 쫓아내려고 할 것입니다. 정국 파행의 원인은 박근혜 대통령이 제공하고 책임은 유승민 원내대표에게 묻는 기이한 장면이 벌어질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다윗 vs 골리앗? 유승민의 존재감은 더 커질 것
국회법 개정안을 놓고 벌이는 박근혜 대통령과 유승민 원내대표의 싸움을 지켜보면 영화에 나왔던 골리앗과 다윗의 대결 장면이 떠오릅니다. 사마귀가 수레에 맞선다는 의미의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말도 생각이 납니다.
사실 유승민 원내대표는 정치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유승민 원내대표의 지역구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묻지마 지지’를 보내는 대구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유승민 원내대표를 ‘심판’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문한 이상 유승민 원내대표의 정치적 목숨이 매우 위태로워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또 누가 알겠습니까? 전화위복(轉禍爲福),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이번에 박근혜 대통령의 표적이 되면서 이미 유명 정치인으로 떠올랐습니다. 야당에도 유승민 원내대표를 좋아하는 의원들이 꽤 많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임기말이 다가올수록 박근혜 대통령과 맞짱을 떴던 유승민 원내대표의 존재감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유승민 원내대표가 좀더 당당해야 할 것입니다. 유승민 원내대표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지혜와 용기인 것 같습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