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20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제1차 회의 모습. 왼쪽부터 박주민·이낙연·이해찬·이인영 공동선대위원장.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어리석은 의심이면 좋겠다. 정치개혁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한다 믿었던 더불어민주당의 진정성을, 이제 와 의심해야 한다는 건 슬픈 일이다. 그러나 의심은 갈수록 깊어진다. 귀를 의심하고 싶은 집권당 수뇌부의 발언들이 잇따르기 때문이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판단해야 한다”(2월21일)는 윤건영 전 청와대 국정기획상황실장의 발언이 나왔을 때만 해도 ‘원론적 언급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비례정당 창당은 우리 입장이 아닌데, 여러 의병들이 만드는 것을 내가 말릴 수는 없지 않으냐”(2월23일)는 이인영 원내대표의 말을 접한 뒤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본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는 ‘공식’의 차단막 뒤에서, 모호한 비유와 인용으로 상반된 메시지를 발신하는 ‘비공식’의 정치술을 숱하게 목격해온 탓이다. 집권당 원내대표의 ‘의병론’에서, 농성전에 지친 군주가 성 밖 신민들에게 전하는 근왕의 전교(종묘와 사직을 위해 백성 된 도리를 다하라!)를 떠올린 게 비단 나뿐이었을까.
물론 ‘미래통합당에 1당 지위를 내줄 수 있다’는 집권당의 우려엔 근거가 있다. ‘눈 뜨고 당하느니, 뭐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감도 이해할 수 있다. 여권에 흘러다니는 시뮬레이션 자료에는 민주당이 비례정당을 만들지 않을 경우, 미래통합당이 비례정당으로 연동제 적용 의석의 3분의 2(20석)를 쓸어가 과반 의석을 확보하게 된다는 예측이 담겨 있다. 집권 후반기 급격한 권력 누수를 걱정해야 할 집권당 수뇌부로선 충격과 공포가 남다를 것이다.
그러나 총선 패배에 대한 위기감만으로는 비례민주당 문제가 여권의 긴급 의제로 떠오른 이유가 잘 설명되지 않는다. 눈여겨볼 부분은 최근 여권 지지층에서 빠르게 확산하는 ‘대통령 탄핵 시나리오’다. 미래통합당이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할 경우 ‘윤석열 검찰’이 머잖아 내놓을 청와대 선거개입 의혹 사건 수사 결과를 근거로 문재인 대통령 탄핵에 나설 것이란 게 핵심 줄기다. ‘집권 후반기 권력 누수론’의 묵시문학적 판본인 셈이다. 이 종말론적 시나리오에 따르면,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종묘사직 수호를 위해) 비례민주당을 만들어(의병을 일으켜) 미래통합당의 과반 확보를 저지하는 것(외적을 물리치는 것)은 집권당과 충성스러운 지지자(백성)의 의무가 된다. ‘정권 수호’라는 현실의 목표 앞에서 ‘정치개혁’이란 명분과 대의를 고집스레 붙드는 건 ‘무책임한 신념윤리’로 격하된다.
물론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부분 도입한 선거제도 개혁의 취지가 미래통합당의 위성정당 창당으로 이미 무력화됐다는 지적도 설득력은 있다. 반칙에 대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하는 반칙은, 반칙이 아닌 변칙일 뿐이라는 논리 역시 그럴듯해 보인다.
그럼에도 비례민주당 창당이 정치적 책임윤리에 부합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인지에 대해선 여전히 회의적이다. 총선까지 남은 시간을 고려하면 창당까지는 가능하더라도 공천 작업까지 마무리 짓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얘기도 들린다. 창당에 공천 실무까지 속성으로 마무리 짓더라도, 선거에서 원하는 결과를 거둘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목표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보수층에 견줘, 비판의식과 가치지향성이 뚜렷한 리버럴·진보층이 여당의 기대만큼 호응할지도 장담하기 힘든 까닭이다.
비례민주당이 성공해 민주당이 1당 지위를 지킨다면 어떻게 될까? 대통령의 레임덕은 늦춰질 것이다. 그러나 소수정당의 지분이 축소되고 양당구도가 공고화되면서 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의 대결 정치는 한층 가팔라질 것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정치에 대한 냉소와 혐오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리란 점이다. 가치와 윤리와 명분이 설 자리가 좁아지면서 ‘반인반수의 정치’는 완전한 ‘짐승의 정치’를 향해 거침없이 진격할 것이다. 그래서 저 파국적인 ‘탄핵 시나리오’ 못지않게 비례민주당의 성공이 가져올 정치의 퇴행이 나는 두렵다.
이세영 정치팀 데스크 mon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