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다양한 미생물 종들의 인체 장내 분포를 표현한다. 아래는 장내미생물들의 현미경 영상들. 미국 오스틴 텍사스대학교,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박테리아는 빠르게 증식한다. 생존조건이 맞아떨어지면 대장균은 불과 20분마다 2배씩 증식한다. 반대로 환경 조건이 불리해지면 급속히 사멸해버린다. 이처럼 빠르게 증식하고 사멸하는 박테리아들이 수십, 수백, 수천 종이 모여 하나의 생태계를 이룬다면, 그 생태계는 쉽게 격동하며 매우 불안정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연에서 보는 실제는 이와 다르다. 일례로, 건강한 사람 몸에서 장내미생물 군집은 안정적이며 지속적인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다. 박테리아 군집과 공존의 방식이 어떠하기에?
“자연의 미생물 생태계는 놀랄만한 다양성을 지닌다. 종종 아주 작은 공간에 수백에서 수천 종이 공존하며 서식한다. 미생물 생태계는 어떻게 그토록 높은 다양성을 확보하고 유지할 수 있을까? 이는 이른바 ‘
플랑크톤의 역설(paradox of plankton)’이라 불린다. 특히나 미생물은 기하급수로 빠르게 성장하고 영양물질을 차지하기 위해 맹렬한 경쟁을 벌인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플랑크톤의 역설은 놀라운 현상이다. 실제로 ‘경쟁을 통한 배제’의 원리로 보면, 지속적인 생태계 안의 미생물 종 수는 가용한 영양물질의 수를 초과할 수 없다고 가정된다.
이런 수수께끼를 키우듯이, 이론적인 연구들은 다양성 높은 생태계가 일반적으로는 불안정에 빠지기 쉽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새로운 물음을 던져준다.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미생물 생태계들이 어떻게 그토록 높은 다양성을 지니면서도 상대적인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걸까?”(
논문 서두에서)
먹이자원이 한정되어 있는데도 서로 다른 다양한 박테리아 수백, 수천 종들이 한데 모여 어떻게 생태계의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는 미생물 생태계의 수수께끼를 풀려는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물음이 되었다. 최근 물리학자들이 수학적인 모형을 제시하며 이런 물음을 푸는 데 도전했다.
인도 사이먼스연구센터와 미국 일리노이대학(어배너-섐페인) 소속 생물물리학 연구자 2명은
물리학 저널 <피지컬 리뷰 레터스>에 생물종 다양성과 안정성이 함께 증가하는 미생물 생태계를 모사하는 수학적, 확률론적인 시뮬레이션 모형을 발표했다. 모형에 따르면, 미생물 생태계의 다양성과 안정성을 좌우하는 것은 협력이나 경쟁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연쇄사슬처럼 이어지는 먹이자원의 관계 덕분인 것으로 나타난다. 논문은 공개형 물리학논문 저장소
‘아카이브(arXiv.org)에서도 볼 수 있다.
미국물리학회(APS)의 논문 해설 사이트
<피직스>의 보도와 논문을 보면, 연구진은 복잡한 미생물 생태계의 역동성을 매우 단순화해 모형을 만들었다. 모형의 토대가 된 가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특정 박테리아 종은 특정 먹이자원을 먹고 산다. 둘째, 시뮬레이션의 환경에서는 단 한 가지의 먹이자원만이 지속적으로 공급된다. 셋째, 먹이자원을 먹는 박테리아는 두 가지의 대사산물을 분비하는데 이 대사산물은 다시 다른 박테리아 종의 먹이자원이 된다. 이들은 다시 또 다른 두 가지 대사산물을 분비해, 또 다른 박테리아 종에게 먹이자원을 제공한다. 이렇게 점차 새로운 박테리아 종들이 특정 먹이자원을 먹으면서 먹이자원을 대사산물로 분비하는 생태계의 일원이 된다. 생태계는 점점 더 복잡하게 성숙한다.
연구진은 이런 모형에서 새로운 박테리아 종들이 점점 더 많이 생태계의 일원이 되면서 종 다양성이 커지는데, 그러면서도 생태계의 안정성 또는 지속성은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밝혔다.
이런 모형은 동물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과는 달리 자신의 먹이를 먹고서 다른 종의 먹이를 생산하는, 시간적으로 선후가 있는 먹이자원의 연쇄사슬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된다.
다양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높여가는 박테리아 생태계의 역동성 모형.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나아가는 방향은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네모는 먹이자원, 동그라미는 서로 다른 먹이자원들을 나타낸다. 특정 먹이자원을 먹고 사는 미생물이 대사산물로 두 가지를 분비하면, 다시 이 둘은 다른 박테리아 종의 먹이자원으로 이용된다. 맨오른쪽 그림은 이렇게 구축된 생태계에 새로운 박테리아 종이 들어섰을 때에, 특정 먹이자원을 두고서 기존 박테리아 종과 경쟁함을 보여준다. 아래 그림에서는 새로 등장한 박테리아 종이 경쟁을 통해 기존 종의 자리를 대체했을 때(아래 왼쪽), 또는 경쟁에서 실패했을 때(오른쪽)을 나타낸다. 출처: 피지컬 리뷰 레터스, https://arxiv.org/abs/1711.00755
모형에는 경쟁의 원리도 구현되었다. 연쇄사슬에 있는 특정 먹이자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경쟁이다. 예컨대, 모형의 미생물 생태계에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박테리아 종들이 우연히 들어와 특정 먹이자원을 차지하려고, 이미 그 먹이자원의 연쇄사슬에 자리를 잡고 사는 박테리아 종과 경쟁을 벌인다. 이주 종과 토박이 종의 경쟁이 된다. 만일 이주 종이 특정 먹이자원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한다면, 이주 종은 그 먹이자원을 먹고 사는 생태계 일원의 자리를 차지하고 정착할 수 있다. 이들이 분비하는 대사산물은 새로운 박테리아 종들을 불러들일 수 있다.
반면에 연쇄사슬 속의 먹이자원 경쟁에서 패한 기존 종뿐 아니라 그 종의 대사산물 먹이자원에 의지하던 다른 박테리아 종들은 연쇄로 사멸한다. 연구진은 이런 사건을 일러 “연쇄적 사멸 사태(extinction avalanche)”라고 불렀다. 연구진은 미생물 생태계가 점점 커지고 성숙할수록 이런 연쇄 사멸 사태는 줄어들고 생태계에 끼치는 영향력도 줄어드는 것으로, 모형 시뮬레이션에서 나타났다고 밝혔다. 생태계의 안정성은 유지된다.
연구진은 이런 모형이 박테리아 군집의 실제 데이터와도 상당히 일치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모형과 실제 데이터의 비교 분석에서, 인체 구강 미생물, 토양 미생물, 오수처리공장 미생물, 메탄생산 바이오반응기 미생물 등 군집의 데이터를 사용됐다. 연구진은 논문에서 특히 구강 미생물군의 데이터에선 나중에 자리 잡는 미생물 종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미생물 종에 좌우되는, 즉 시간적인 선후 관계를 뚜렷히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모형 연구는 복잡한 변수를 단순화해 새로운 통찰을 제시해줄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모형 연구일 뿐이다. 논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수학적, 확률론적 시뮬레이션 모형은 단순화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 연구진은 “단순화를 무릅쓰고서 오랜 동안 이어진 미생물 생태계의 수수께끼를 풀고자 우리는 미생물 생태계를 확률론적으로 구성하는 개념적 모형을 시도했다”는 의미를 강조하면서도 단순화 모형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음을 밝혔다. 연구진은 “모형에서 우리는 미생물 각자가 한 가지 먹이자원을 이용한다고 가정했으나 실제에서 미생물들은 여러 먹이자원들을 먹으며 성장한다”며 앞으로 더 복잡한 요인들을 감안하는 후속 모형을 개발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논문 초록 (우리말 번역)
미생물 생태계는 현저하게 다양하고 안정적이며, 대체로 중심 종과 주변 종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연구에서 우리 연구진은 이런 창발적인 속성을 보여주는 개념적 모델을 제안한다. 그것은 실제 생태계 데이터, 특히 종 구성비와 우세 분포의 데이터와 정량적으로 일치함을 보여준다. 우리 모델에서 먹이자원 경쟁과 대사적 공생은 확률론적 생태계의 구성(assembly)을 촉진한다. 단 하나의 먹이자원만 공급되는 조건에서도 생태계가 높은 다양성, 증진된 안정성, 그리고 (모형의) 부분적 재현성을 나타낼 수 있음을 우리 모형은 보여준다.
[Akshit Goyal et al., PRL(2018);
https://arxiv.org/abs/1711.00755]
오철우 선임기자 cheolwo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