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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학 과학

개발원조 나선 ‘포스터 차일드’의 나라, 한국의 경험

등록 2018-10-01 11:20수정 2018-10-01 16:25

[8인의 여덟갈래 정책산책]
‘과학기술 성공사례’ 한국의 공적개발원조 정책방향은
아사 상태의 유아, 빈곤 속에서 활짝 웃는 꼬마들, 질병에 시달리는 아이, 낙후한 환경에서 수업을 듣는 소녀들. 유니세프나 굿네이버스 같은 원조 및 구호 기구들이 홍보와 모금활동에 널리 사용하여 우리에겐 이제 너무 익숙한 포스터에 등장하는 이런 아이들을 ‘포스터 차일드(poster child)’라고 부른다. 한국전쟁 직후 한국은 미국 정부와 유엔을 비롯한 여러 개발 기구의 구호와 원조에 의존했고, 서방의 대중매체에 등장한 포스터 차일드들은 가난한 나라 한국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동생을 등에 업은 이주민 소녀가 M-26 탱크 앞을 지나간다. 출저: 미국 해군/Maj. R.V. Spencer, UAF. 1951년 6월9일
아사 상태의 유아, 빈곤 속에서 활짝 웃는 꼬마들, 질병에 시달리는 아이, 낙후한 환경에서 수업을 듣는 소녀들. 유니세프나 굿네이버스 같은 원조 및 구호 기구들이 홍보와 모금활동에 널리 사용하여 우리에겐 이제 너무 익숙한 포스터에 등장하는 이런 아이들을 ‘포스터 차일드(poster child)’라고 부른다. 한국전쟁 직후 한국은 미국 정부와 유엔을 비롯한 여러 개발 기구의 구호와 원조에 의존했고, 서방의 대중매체에 등장한 포스터 차일드들은 가난한 나라 한국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동생을 등에 업은 이주민 소녀가 M-26 탱크 앞을 지나간다. 출저: 미국 해군/Maj. R.V. Spencer, UAF. 1951년 6월9일
2018년 7월 23일 월요일 저녁 8시. 폭우가 내리는 가운데 라오스 메콩강 지류에 건설 중인 세피안-세남노이 수력발전소(이하 ‘세피안 사업’)의 보조댐 하나가 무너져 내리는 사고가 일어났다. 1995년에 세피안 사업이 처음 계획된 이래 20년 만에 수력발전의 정식 가동을 앞에 두고서 일어난 참사였다. 이 사고로 인해 50억 세제곱미터, 혹은 올림픽 수영경기장 200만 개를 채울 수 있는 양의 물이 댐 하류에 있는 라오스 마을을 휩쓸었다. 40여 명이 목숨을 잃고 실종자도 1000여 명에 달하며, 7000여 명의 이재민이 보금자리와 재산과 가족을 잃었다.[1] 흙탕물에 잠긴 마을과 지붕 위에서 구호보트를 기다리는 생존자들의 사진을 통해 세피안-세남노이는 전세계적인 화제가 되었고, 그간 무분별하게 추진되던 메콩강 유역의 인프라 사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들이 재조명 받게 되었다.

국내 언론도 세피안 참사에 크게 주목했다. 또한 세피안 사업을 향한 시민단체와 환경 및 개발 전문가들의 비판이 쏟아졌는데, 이는 라오스의 세피안 사업이 다름아닌 국내 기업의 기술지원과 한국 정부의 공적개발원조로 추진된 사업이기 때문이다. 에스케이(SK)건설과 한국서부발전, 그리고 타이전력공사의 자회사로 이루어진 콘소시움이 수주한 10억 달러짜리 대형 토목사업에 한국 정부가 라오스 정부에 7000만 달러에 달하는 유상원조를 지원하는 구조로, 세피안 사업은 한국 정부와 국내 기업이 함께 참여하는 민관협력사업(Public-Private Partnership, PPP)의 첫 사례였다.[2]

세피안-세남노이 댐 붕괴 후 물에 잠긴 아타푸(Attapeu)주 마을. 출처: 영국 일간 <더 가디언(The Guardian)>
세피안-세남노이 댐 붕괴 후 물에 잠긴 아타푸(Attapeu)주 마을. 출처: 영국 일간 <더 가디언(The Guardian)>
라오스 정부와 양해각서를 체결할 당시 한국 정부는 이번 사업을 인프라 건설을 지원해 현지 주민의 생활환경을 개선하고 라오스 정부의 재정 확충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기업의 현지 진출까지 가능케 하는 “1석 4조”의 효과를 거둘 민관 협력의 모범사례로, 주변국에도 PPP를 확대하기 위한 중요한 발판으로 여겼다.[3] 그만큼 세피안 사업은 한국이 공적개발원조를 확장하고, 한국이 공여국으로서 입지를 다지는 데 중요한 의의를 부여하는 사업이었다. 한국 정부는 1987년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설치와, 1991년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설립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국제개발협력을 시작한 이후 꾸준히 공적개발원조 지출을 늘려나가고 있다.

표1. 2006-2016년 한국정부 유형별 원조 순지출액(100만 달러). 출처: ODA 통계 종합현황 (https://stats.koreaexim.go.kr/index_outer.html).
표1. 2006-2016년 한국정부 유형별 원조 순지출액(100만 달러). 출처: ODA 통계 종합현황 (https://stats.koreaexim.go.kr/index_outer.html).
다른 공여국들에 비하면 적은 금액일 수 있지만, 한국의 개발협력 사업은 한국의 개발 경험을 전수한다는 면에서 매력적으로 여겨진다. 또한, 1990년대 이후 과학기술을 기반한 ‘지식경제’가 국제개발계에 큰 키워드로 부상하면서, 한국은 일찍이 과학기술체계를 설립하고 자체적인 연구개발을 통해 산업화에 기여했다는 점이 부각되었다. 한국의 이런 경험은 여러 개도국의 관심을 받았으며, 한국 정부는 과학기술 관련 사업을 공적개발원조 사업에서 중요한 부문으로 다루어왔다. 과학기술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는 개발기여도지수(Commitment to Development Index)만 봐도 알 수 있다. 미국 워싱턴 소재의 싱크탱크인 글로벌개발센터(Center for Global Development, CGD)는 매해 세계 최고 선진국들의 국제개발원조사업을 분석하는 보고서를 발간하는데, 지난 9월 18일 발표된 2018년 보고서의 종합평가에서 한국은 꼴찌로 지목됐지만, 과학기술 부문에선 무려 1위를 차지했다.[4]

국제개발사업은 개도국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발전을 도와 국제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매우 정치적인 활동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 국제협력은 외교적 동맹을 맺는 방법이기도 하며, 경제적 영역을 확대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과학기술정책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 글은 한국의 과학기술이 공적개발원조라는 틀 속에서 어떤 모습을 띄고 있는지 살핀다. 한국의 경험을 개도국에게 공유한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할까? 한국의 과학기술정책과 과학기술체계 설립 경험은 어떤 형태로 공유되고 있을까?[5]

국제개발의 ‘포스터 차일드’ 대한민국: 수여국에서 공여국으로

아사 상태의 유아, 빈곤 속에서 활짝 웃는 꼬마들, 질병에 시달리는 아이, 낙후한 환경에서 수업을 듣는 소녀들. 유니세프나 굿네이버스 같은 원조 및 구호 기구들이 홍보와 모금활동에 널리 사용하여 우리에겐 이제 너무 익숙한 포스터에 등장하는 이런 아이들을 ‘포스터 차일드(poster child)’라고 부른다. 포스터 차일드는 또한 특정한 자질 또는 현상의 ‘전형’이라는 뜻을 포함하기도 한다.

한국은 위 두 가지 의미의 ‘포스터 차일드’를 둘 다 경험한 국가다. 미군 탱크를 배경으로 동생을 등에 업고 피난 중인 어린 한국 소녀의 사진은 1950년대 전쟁통의 한국을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사진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1954년, 미국의 대표적인 포토저널리즘 잡지 <라이프(Life)>에 “한국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우리가 일어설 수 있게 도와주시지 않겠어요?’”라는 제목과 함께 빈곤으로 고통받고 있는 한국 어린이들에 대한 사진들을 보도하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6] <라이프>의 독자들에게 한국은 개인 자가용 엔진오일 필터를 주행 5000 마일마다 새것으로 바꿔야 한다는 자동차용품 광고 옆에 소개되는, 지구 반대편에서 남루한 차림새의 배고픈 아이들이 무릎을 꿇고 구걸하는 나라였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한국은 미국 정부와 유엔을 비롯한 여러 개발 기구의 구호와 원조에 의존했고, 서방의 대중매체에 등장한 포스터 차일드들은 가난한 나라 한국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1954년, 미국의 대표적인 포토저널리즘 잡지 <라이프(Life)>에 “한국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우리가 일어설 수 있게 도와주시지 않겠어요?’”라는 제목과 함께 빈곤으로 고통받고 있는 한국 어린이들에 대한 사진들을 보도하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하워드 러스크 (Howard Rusk), “Voice From Korea: Won’t You Help Us Off Our Knees?”, <라이프>, 1954년 6월7일, 178-189쪽
1954년, 미국의 대표적인 포토저널리즘 잡지 <라이프(Life)>에 “한국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우리가 일어설 수 있게 도와주시지 않겠어요?’”라는 제목과 함께 빈곤으로 고통받고 있는 한국 어린이들에 대한 사진들을 보도하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하워드 러스크 (Howard Rusk), “Voice From Korea: Won’t You Help Us Off Our Knees?”, <라이프>, 1954년 6월7일, 178-189쪽
몇 십 년 후, 한국은 성공적인 국제개발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사례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국제 원조를 받아 기근을 면하던 한국이 반세기 남짓한 기간에 국가건설과 산업화도 모자라 의무교육과 의료보험을 실시하고, 고도성장과 민주화를 이루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해 결국 해외원조 공여국이 됐다는 것은 국제개발계의 전래동화 같은 이야기이다.

여기에 더욱 ‘감동적’인 점은 한국은 원조기관들의 비관적인 예상을 뒤집었다는 것이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유엔 한국재건단[7]의 인도 대표는 “한국에서 경제 재건을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 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라고 단언했다고 한다.[8] 그러나 이 평가는 정확히 50년 후 완전히 뒤집어졌다. 개발경제학자 마이클 토라도(Michael Todaro)는 “국제무역과 무역정책이 어떻게 빈곤이 만연한 저개발국가를 한 세대 만에 고소득 상태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 그 성공사례를 들어보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그 답은 의심할 여지없이 한국이다”라고 한 바 있다. 그만큼 한국은 이례적이지만 동시에 모범 사례로 국제개발계의 포스터 차일드로 여겨진다.[9]

표2. KSP 경제발전경험 모듈화사업 프로그램 주요 성과. 출처: KSP 공식 웹사이트
표2. KSP 경제발전경험 모듈화사업 프로그램 주요 성과. 출처: KSP 공식 웹사이트
엄청난 빈곤 상황에서 기적적인 경제 발전을 이룬 한국의 개발 사례는 그만큼 개발도상국에게 더욱 매력적이다. 한국 정부는 이를 강점으로 살려 한국의 경제 발전 경험을 토대로, 한국이 축적해온 지식을 공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지식공유프로그램(Knowledge Sharing Program, KSP)이라는 플래그십 사업을 운영 중이다. KSP 사업의 꽃은 양자간 국가정책자문사업으로, 2004년에 2개의 사업으로 시작해, 2012년까지 39개 협력국가를 대상으로 무려 441개의 사업에 착수했다.[10]

국가정책자문사업의 구조는 다른 국제개발 정책사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수여국의 수요와 실태조사를 통해 적합한 협력 분야를 도출하고, 역량 강화를 위한 연수를 지원하고, 최종적으로 정책보고서를 통해 정책자문을 전달한다. 단, 한국의 경험이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는데, 정책 실무자들이 “한국의 기관을 방문함으로써 실제 한국의 사례 학습을 통해 한국의 발전 경험을 체험”하는 연구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11] KSP의 또 하나 중요한 요소로 한국의 주요 정책들을 골라 표준화 된 방식으로 정리하여, 양자간 정책자문사업에 기초자료로 사용될 수 있도록 사례연구를 개발하는 경제개발경험 모듈화사업이 있다. 2011년부터 추진된 모듈화 사업은 8개의 분야에 걸쳐 현재까지 총 139개의 모듈을 발간했는데, 행정 및 정보통신기술(ICT), 농어업, 인적자원 분야 등 여러 모듈들이 과학기술정책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12]

이와 같이 KSP에서 ‘한국의 경험’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2000년대 중반부터 정부는 공적원조 체계의 효율성 제고를 위해 국제개발협력 개선 종합대책과 국제개발협력 선진화 방안 등을 논의하기 시작했다.[13] 개발원조의 효과성에 대한 일반적 우려에 더해,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원조 지출이 적은 상황에서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원조사업을 진행할지에 대한 고민들이 논의되었다. 처음엔 당시 범세계적 목표로 제시되었던 새천년개발목표(MDG) 달성을 위한 체계를 모색했다면, 2008년 이후엔 선택과 집중의 원칙을 적용시켜 한국이 가장 도움이 될 수 있는 지역과 분야를 선정해 원조를 최적화해야 된다는 방향이 제시되었다. 이는 곧 ‘한국형 공적개발원조(ODA)’의 시초로, 여러 분야에서 개발과 발전을 겪어본 경험을 살려 부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원조 방안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즉, 한국형 ODA 모델의 추진방안의 첫 단계는 다름아닌 “우리나라의 발전 경험 및 비교우위를 분석”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표3. 한국형 ODA 모델 추진방안. 출처: 대한민국 ODA 백서 (2017) 87쪽.
표3. 한국형 ODA 모델 추진방안. 출처: 대한민국 ODA 백서 (2017) 87쪽.
한국의 성공 경험과 사례 공유, 그리고 그 사이에 배제되는 것들

KSP 모듈화 사업과 정책자문사업을 통해 한국의 경험은 어떻게 공유될까? 한국의 지식기반사회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과학기술정책의 시발점으로 여겨지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키스트)과 한국과학기술원(KAIST, 카이스트), 그리고 대덕연구개발특구의 설립 과정을 정리한 모듈화 사업의 열 번째 보고서 “연구개발과 기술교육”을 예로 들어보자.

“연구개발과 기술교육”은 KSP 모듈들이 공통적으로 따르는 구성에 따라 각 정책의 추진 배경과 과정, 그리고 성과와 시사점을 제시하며 당시의 여건과 목표, 장애물들과 결정 과정들을 아주 상세히 설명한다.[14] 미국 정부의 원조가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키스트와 카이스트 설립 과정을 살펴보면, 키스트 설립에 미국 바텔연구소가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또는 카이스트에 교수진과 학생을 어떻게 유치했는지 등, 세부 정책을 검토하는 데 높은 비중을 두고 있다. 이런 자세한 묘사는 단순히 두 기관이 어떤 과정을 통해 설립됐는지 알려줄 뿐만 아니라, KSP 사업이 어떤 모습의 과학기술과 수여국을 강조하려는지 엿볼 수 있게 한다.

먼저, 키스트와 카이스트의 설립은 공여국과 수여국이 그 필요성과 중요성을 깨닫고, 동일한 목표를 공유하여 협력한 결과물로 소개된다. 강한 지도자의 중요성 또한 대두된다. 예를 들어, 국내 정치권 또는 전문가 집단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내에서도 고급인력을 양성할 수 있는 기관을 설립해야 된다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결의는 물론, 원조국과 세부적인 정책 방안을 협의할 수 있는 리더십과 전문성을 가진 최형섭 박사와 정근모 박사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

또한, 과학기술 연구와 인력을 위한 기관들이었던 만큼 과학자들에 대한 얘기도 찾을 수 있다. 연구자들은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중요한 원동력으로서 여러 혜택과 특권을 받음과 동시에, 어려운 환경에서 근면하고 헌신적으로 연구를 수행한 개인들로 묘사된다. 현지 정부의 강한 의지와, 공여국과 수여국의 긴밀한 협력의 중요성, 그리고 주요 이해관계자들의 협조가 개발사업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소극적으로 다뤄지거나 아예 언급되지 않은 부분들도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 과정에서 모든 연구활동이 동등하게 정부의 지원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정부는 정권의 주요 관심사인 경제개발과 국가안보와 직결된 분야, 즉 산업기술과 방위산업 분야를 우선시 했으며, ‘실용’에 방점을 둔 명확한 우선순위는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이 후순위로 밀려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연구자들은 자연스럽게 연구 자율성을 빼앗기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의 강한 정치적 영향 아래 성장한 연구계는 추후 존립의 문제까지 직면해야 했다. 예를 들어, 박정희 정권 이후 키스트는 기관의 최고 후원자를 잃어 카이스트와 “원하지 않는 통합의 대상”이 되었다.[15]

하지만 KSP 보고서는 연구 자율성에 대한 언급을 최소화 하였고, 키스트와 카이스트의 통합을 “고급 과학기술 인력 교육과 종합과학기술 연구를 선도하는 양 기관의 기능을 연계”하기 위한 시도라고 설명했다(27쪽). 한국과학기술계의 설립과 성장과정은 물론 지금까지 화두 되는 문제들을 배제한 것이다.

또한, 공여국과 수여국이 동일한 목표를 공유하고 협력하는 관계로 간단히 묘사된 것과 달리, 한국은 당시 공여국인 미국과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할 수 없는 권력관계 속에서 원조를 받아왔고, 때론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 수여국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한국은 공업화를 서두르려는 목표와 사업계획을 미국에게 제안했지만, 미국은 한국의 부패와 경제성장율 등을 고려했을 때 당장의 공업화는 불가능하며 한국의 사업 목표가 지나치게 높다는 이유로 한국 정부의 계획을 번번히 무산시켰다. 이러한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약화시키고자 한국 정부는 1962년 서독, 이탈리아 등에서 개발 차관을 끌어오는 사업을 성사시키기도 했다.[16]

마지막으로, 강한 리더십과 비전으로 키스트의 설립과 성공을 이끈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 역시 미국의 대한개발정책에 동의하는 인물로 보기 힘들다. 그가 1977년부터 집필한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개발전략”은 1960년 미국의 국제개발이론을 이끈 월트 로스토우(Walt Rostow)의 선형적 단계론을 비판하며, 서구 선진국들의 국제개발 노력들의 “결론과 전망은 비관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17]

KSP 모듈에서 한국의 ‘성공’ 경험의 이면과 한계점, 그리고 그 과정 속의 갈등에 대한 언급은 매우 소극적이거나 전혀 다뤄지지 않고 있다. 이런 누락은 실제 양자간 정책자문사업에서 한층 더해진다. 2011년 ‘우즈베키스탄 국가혁신시스템 강화전략 사업’의 결과보고서는 키스트와 카이스트의 설립과정을 한 쪽 안팎으로 정리하여 소개한다.[18] 보고서는 고급 연구인력 양성을 포함해 직업훈련, 영재교육, 해외유학 지원 등 다방면의 과학기술인력 양성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사례의 한계점과 수여국-공여국 간의 갈등에 대한 서술은 찾아보기 힘들다.

뭣이 중헌디?...개발과 공적원조 사업의 목적

한국의 공적개발원조 활동이 더욱 활발해진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고, KSP 모듈화사업 같은 시도를 통해 여러 사례연구들을 한 곳에 모아 접근을 용이하게 하는 일은 가치 있는 작업이라는 데에 이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만큼 한국이 국제사회에 활발하게 기여할 수 있는 기회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특히, 최근 들어 북한과의 교류협력의 가능성, 그리고 그에 따를 경제적 이익에 대한 기대가 여러 분야에서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북한 정부가 반드시 한국을 협력 대상 국가로 삼을 것이라고 안주하면 안 된다는 경고도 들려온다. 어떻게 하면 다른 협력 가능 국가들에 비해 더 매력적인 상대국이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대북 공적개발원조가 실현된다면, 남한은 다시금 남한형 ODA의 특수성을 강조하며 “남한 발전경험 및 비교우위 분석”을 우선시 해야 될까?

한국형 ODA의 모델 추진방안이 흥미로운 점은 그 출발점이 수여국에 대한 이해에 앞서 한국의 경험에 대한 분석을 중요시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위에서 간략하게나마 보았듯이, 한국의 경험을 분석하고 공유하는 과정에서 개발사업의 중요한 요소들이 배제된다. 개발도상국의 상황을 묘사할 때 흔히 “1950-60년대 한국과 똑같다”라는 표현한다. 하지만 1950-60년대의 한국과 2010년대의 케냐, 아이티, 아랍에미리트(UAE), 라오스는 매우 다른 환경에 놓여 있다. 한국이 예기치 못했던 성과들을 이룬 배경엔 탈식민 시기, 전후 개발독재, 그리고 냉전이라는 아주 특수한 시대적 맥락이 존재했고, 성공적인 과학기술정책도 이 시대의 산물이다. 한국의 기술적 또는 정책적 성과를 지식 모듈로 만들고 공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모방될 수 없는 환경과 변수들이 과거 정책 이행 과정에 끼친 영향을 인정하고 강조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한국의 국제개발사업 역시 단순히 수여국의 재정이나 자원뿐이 아닌, 특수한 맥락을 존중하며 원조사업을 수행할 수 있다.

한국의 “비교우위”는 단순히 한국이 개발에 성공한 경험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실패사례와 갈등, 그리고 한계점들도 함께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한국의 특수한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다. 고속성장의 부작용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것이 성공사례로서 한국이 전달하려는 지식과 모순되는 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자랑스러운 한강의 기적 이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한국형 ODA의 차별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형 ODA를 최빈국에서 선진국 모임인 OECD에 가입한 최초 국가라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자랑하고 한국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창구의 기능만을 강화해선 안 된다.

<현대 한국의 과학기술정책>의 공저자 홍성주와 송위진은 1950-60년대 한국이 미국의 원조를 받아 과학기술 분야를 성장시키는 과정을 묘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개발 탈출을 고민하는 국가라면, 1960년대 한국 경제 상황에서 중요한 시사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해외 원조를 수원하는 국가가 원조국에 대해 지니는 본질적인 긴장이자, 국가주의적 태도다… 수원국이 원조국에 대해 가지는 긴장과 국가주의적 태도를 적절히 노출시킨다면, 그 긴장의 에너지가 경제개발의 동기로서 작동할 가능성이 있다.”[19]

한국 정부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비롯 그것이 소수 권력자들의 의견이었을지라도) 공여국과 부딪히며 의견을 관철한 경험 역시 한국의 개발 경험의 일부로 강조될 수 있다는 뜻이다. ‘개발 선배’로서 지닌 강점은 오로지 성공한 경험뿐만 아니라, 수여국의 위치에 있어본 경험과, 그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

[1] 8월 17일 기준, 연합뉴스 "라오스 댐사고 피해지역에 또 폭우…수재민 이중고” 2018년 8월 17일.

[2] 세피안-세남노이 수력발전사업은 1990년대 중후반에 동아건설이 수주한 사업이었으나, 아시아 경제 위기에 동아그룹이 해체되고 동아건설도 부도나면서, 2007년 경에 SK건설과 서부전력이 수주하게 되었다.

[3] 기획재정부 보도자료, “EDCF, 라오스 대형 수력발전사업에 우리기업 진출 지원,” 2011년 12월 7일.

[4] 한국은 특히 정부와 기업의 연구개발 사업을 많이 지원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보고서 원문은https://www.cgdev.org 에서 확인 가능.

[5] 이번 글은 국제개발원조를 포괄적인 의미로 접근하여 무상원조와 유상원조를 구분하지 않았다. 단, 정부의 공적개발원조와 관련된 사업과 지출에 있어선, 국제기구 출현과 참여에 해당하는 다자간 원조는 되도록 배제하고, 한국정부와 산하기관들이 직접적인 주체가 되며 한국이라는 정체성이 부각되는 양자간 사업에 초점을 두었다.

[6] 이 기사의 제목에서 ‘일어서다’, ‘회복하다’라는 같은 뜻을 지니고, 똑같이 신체부위를 은유해 비슷하게 인지되며, 어쩌면 더 흔히 사용되는 ‘(Get) on one’s feet’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get) off one’s knees”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인상적이다. 이는 일어서야한다는 목적보다 무너저 있는 상태를 강조하해 보다 비참한 뉘앙스를 띈다.

[7] 한국재건단, 또는 운크라(United Nations Korea Reconstruction Agency, UNKRA)는 한국전쟁 발발 후 구호와 재건을 목표로 창설된 유엔 산하기구로, 1958년에 사업을 종료하고 해체되었다.

[8] 국내에선 꽤나 유명한 이 인용구는 여러 고위인사들의 축사에서 한국의 과거와 현재의 대조를 강조하고 싶을때 특히 널리 쓰이는 반면, 외국 문헌에서 언급이나 원문은 찾기가 힘들다.

[9] 경제인문사회연구회 (2012), 미래사회 협동연구 총서 “한국형 ODA 모델 수립, I. 총론” 29쪽 (http://odakorea.go.kr/ODAPage_2012/pdf/1doc.pdf).

[10] KSP 공식 웹사이트, 국가정책자문사업 프로그램 주요성과 (http://www.ksp.go.kr).

[11] KSP 공식 웹사이트, 국가정책자문사업 프로그램 단계 (http://www.ksp.go.kr)

[12] “KAIST, 포항공대 등 고급과학기술인력 양성” 또는 “한국경제발전 초기 과학기술 도입과 내재화 방안”처럼 과학기술을 위한 정책 사례연구도 있지만, “한국의 KTX 고속철도 및 기존선 고속화 추진 사례,” 또는 “초고속 인터넷 통신망 구축 및 정보화 재원조달” 등 정책을 위한 과학기술 사례연구들 역시 많다. 여덟 갈래 정책산책의 첫 기고글 “과학기술을 위한 정책과 정책을 위한 과학기술”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13] 경제인문사회연구회 (2012), 미래사회 협동연구 총서 “한국형 ODA 모델 수립, I. 총론” 25-26쪽 (http://odakorea.go.kr/ODAPage_2012/pdf/1doc.pdf)

[14] 기획재정부, 한국개발연구원 (2011), “2010 경제발전경험 모듈화 사업: 연구개발과 기술교육”.

[15] 문만용 (2018), “KIST에서 대덕 연구단지까지, 정부출연연구소의 탄생과 재생산” 107쪽, 김태호 엮음, "'과학대통령 박정희' 신화를 넘어: 과학과 권력, 그리고 국가".

[16] 홍성주, 송위진 (2017), “현대 한국의 과학기술정책: 추격의 성공과 탈추격 실험” 58-71쪽.

[17] 임재윤, 최형섭 (2018), “최형섭과 ‘한국형 발전 모델’의 기원” 65쪽, 김태호 엮음, "'과학대통령 박정희' 신화를 넘어: 과학과 권력, 그리고 국가"

[18] 기획재정부, 한국개발연구원 (2012), “2011 경제협력국가와의 경제발전경험 공유사업: 우즈베키스탄, 몽골”.

[19] 홍성주, 송위진 (2017), “현대 한국의 과학기술정책: 추격의 성공과 탈추격 실험” 78쪽.

김규리/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과정 kyuriakim@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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