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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환경

해발 1500m 구상나무 떼죽음, 유력용의자는 기후변화

등록 2020-10-06 04:59수정 2022-01-03 13:08

[기후변화 멸종의 위기, 빙하기 식물을 찾아서]
③ 지리산 구상나무와 땃두릅나무

빙하기 식물들의 피난처 지리산
땃두릅나무·금강애기나리…
연평균보다 빠른 생태시계에 분주
절벽 아래 몸 숨기고 힘겹게 살아가

구상나무는 왜 죽었을까
주요 고사 원인은 수분 스트레스
“많아서” “적어서” 세부 의견은 분분
온난화·태풍 등 기후변화가 성장 방해

단정은 금물, 계속 보아야 안다
“어린나무는 어디선가 또 자라나
10여년 만의 변화로는 결론 못 내
불확실성에 집중, 연구 지속해야”
지난달 15일 지리산에서 찾은 고사한 구상나무들. 구상나무가 말라 죽는 이유는 수분 조건의 변화로 추정된다. 전문가들은 기후변화로 수분 조건이 달라지면 아고산대 식물인 구상나무도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지난달 15일 지리산에서 찾은 고사한 구상나무들. 구상나무가 말라 죽는 이유는 수분 조건의 변화로 추정된다. 전문가들은 기후변화로 수분 조건이 달라지면 아고산대 식물인 구상나무도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백두산에서 시작한 1400㎞ 백두대간의 종점, 지리산은 기후변화의 비밀을 품고 있다.

지리산(1915m)은 남한에서 한라산(1950m)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두 산 모두 과거 빙하기 한반도 전역에서 번성했다가 지금은 산꼭대기에만 남은 ‘빙하기 식물’들의 피난처다. 고도에 따라 다양해지는 식생 때문에 지리산은 한반도 남부 생태계의 유전자 풀(pool) 구실을 한다. 한반도 특산식물의 19%(70종)가 지리산에 있다. 이름부터 특별한 ‘지리바꽃’, ‘지리강활’처럼 여러 지리산 특산식물이 덕유산, 가야산 등 주변 산까지 퍼져 있다. 이런 이유로 1967년 전국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됐고 면적도 가장 넓다.

지난달 15일 <한겨레>는 기후변화로 인한 식물 변화상을 확인하기 위해 지리산에 다녀왔다. 중턱인 경남 산청 중산리(600m)에서 출발해 정상인 천왕봉을 넘어 칠선계곡 부근까지 다녀왔다. 한낮에 여름의 열기가 남아 있던 서울과 달리 지리산의 시간은 완전히 가을로 접어들어 있었다. 지리산국립공원 직원들과 국립수목원 디엠제트(DMZ)자생식물연구과 길희영 연구사와 안종빈 박사후연구원, 신재성 경남산림환경연구원 연구사, 공우석 경희대 지리학과 교수가 동행했다.

지리강활.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지리강활.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지리바꽃.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지리바꽃.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지리산은 구상나무지요.”

랜턴 불빛에 의지해 새벽어둠 속 산길을 오르며 누군가 말했다. 구상나무는 한라산에 가장 많이 분포하지만, 지리산을 대표하는 아고산 식물이다. 최근 기후변화를 주제로 한 언론 보도에 자주 언급되는 한국 특산종으로, 이 나무의 죽음과 관련한 비밀을 찾기 위한 연구가 수십년째 이어져왔다. 해발고도 1500m를 지나자 구상나무 고사목들이 눈에 들어왔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무와 오래전 죽어 하얗게 말라버린 나무가 섞여 있었다. 구상나무는 왜 죽어가는 걸까.

주요한 원인으로는 ‘수분 부족’이 꼽힌다. 최근 10~20년 사이 기후변화로 겨울 적설량과 봄비가 줄면서 고사목도 늘었다는 것이다. 이달 말 발간 예정인 <한국환경생태학회지>에 실리는 ‘국내 구상나무 연구 40년’ 논문을 쓴 구경아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자연환경연구실 부연구위원은 “‘수분 밸런스’가 중요하다는 의미”라며 “식물체 내 수분의 양은 강우량뿐 아니라 광합성과 증산(식물체 내 수분의 증발) 작용의 영향도 받는다. 때문에 죽음의 원인은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구 부연구위원은 공우석 교수와 함께 2001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구상나무의 죽음이 수분 부족과 관련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반면 ‘수분 과다’가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안웅산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한라산연구부 연구원은 지난해 ‘한라산 구상나무의 공간적 고사패턴 분석을 통한 고사원인 추정’ 논문에서 수분이 많아도 구상나무가 죽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지리산의 구상나무 고사율은 볕이 잘 드는 남동사면이 그늘진 북사면보다 높은데 남동사면이 강우량이 많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안 박사는 “구상나무가 물을 좋아해서 계곡에 산다고 하지만 계곡은 경사가 심해 배수가 더 잘된다. 구상나무는 건조한 모래질 토양에서도 잘 산다”고 주장했다. 반면 공 교수는 “수분이 많아서 죽는다면 경사가 완만한 지역은 더 고사율이 높아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주장 역시 반박 가능하다”며 재반박했다. 그러나 경사가 완만한 곳에서 고사율이 높다는 연구도 있어 이 역시 반박이 가능하다.

“입사했던 15년 전보다 산이 위험해진 것은 분명해요. 물이 다 모이는 산 아래 집중호우 피해는 갈수록 커지고 있어요.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런 변화를 사람이 10년 20년 봐서 알 수 있나요.”

동행한 국립공원공단 직원은 언론이 주목하는 구상나무의 죽음이 기후변화 때문이라고 단정적으로 결론 낼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처럼 100년도 아닌 지난 10여년의 변화만으로 기후변화가 원인이라 말하는 것에는 과학적 근거가 충분치 않다. 다만 적든 많든 식물이 생장하는 과정에서 ‘수분 스트레스’는 주요 고사 원인이고, 기후변화가 이런 점진적이고(온난화) 극단적인(태풍, 집중호우, 가뭄 등) 수분 조건의 변화를 초래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전염병, 뿌리 뽑힘을 포함한 여러 파생 효과가 생태계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연구자들은 한목소리로 말한다.

구상나무 82그루의 나이테를 바탕으로 고사 원인을 분석한 서정욱 충북대 목재종이과학과 교수는 성급하게 답을 찾기보다 ‘불확실성’ 자체에 집중하고 연구를 계속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 교수는 “연구를 할수록 답을 찾기가 어렵다. 기후변화 때문에 구상나무가 사라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또 다른 곳에서는 치수(어린나무)가 자란다. 때문에 변화의 결과로 구상나무가 멸종된다고 단정하면 안 된다”며 “자연상태에서 나무의 교체는 자연스러운 일인데, 문제는 이 변화가 급히 진행되고 있다.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기후변화로 인한 스트레스에 나무가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천왕봉으로 오르는 마지막 계단길 옆 키 작은 구상나무가 하늘을 향해 서 있었다. 구름이 머금었던 수증기가 초록색 구상나무 잎에 물방울이 되어 맺혀 있었다. 고도가 높을수록 기온 상승 폭이 큰 것도 아고산 식물인 구상나무의 죽음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국립공원연구원 융합연구부 자체 측정 결과 전라북도 남원(132m)은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연평균기온이 1.4도 올랐지만, 같은 기간 반야봉(1650m)은 2.2도가량 올랐다. 고사한 개체 수는 2008년과 비교해 2018년 평균 3.7배 늘었다.

국립수목원도 고도 1000m, 1500m의 지리산 칠선계곡과 세석 지역에서 모니터링한 결과 개엽·개화 등 식물의 생장 시점을 앞당기는 봄철 평균기온이 2010년 각각 8.8도, 7.6도였는데 2018년 11도, 9.9도로 올랐다고 분석했다. 지난 6월 <한겨레>가 보도한 전국 10개 수목원 나무들의 지난 10년 동안의 생태시계 추이(6월29일치 1면)를 보면 개엽·개화·낙엽 시기가 연평균 1.34, 0.94일, 0.08일 빨라지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해발고도가 높은 지리산 지역은 이보다 더 이른 1.5일, 2.2일, 0.19일씩 빨라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국립수목원 식물자원연구과 손성원 박사는 “고도가 높아질수록 기온 상승 폭이 크기 때문에 고도가 높은 지리산 모니터링 값이 더 크게 나왔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고도가 높아질수록 강우량이 늘어나기 때문에 토양 상태 등을 고려해야 구상나무 죽음의 진실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다.

어린 구상나무.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어린 구상나무.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칠선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은 가팔랐다. 수직 절벽에 가까운 바위를 내려가며 절벽에 숨은 다른 ‘빙하기 나무’들을 찾았다. 귀한 나무들은 보기 힘든 곳, 어둡고 습한 북사면에 있었다. 구상나무 죽음에 가려 있지만, 다른 나무들도 힘겹게 생명을 유지해가고 있었다. 기온이 오르면 분포지가 줄 것으로 예상되는 ‘기후변화 취약종’인 ‘땃두릅나무’는 이미 노랗게 단풍이 든 채 1850m 절벽 아래 숨어 있었다. 지리산을 자주 찾는 신재성 연구사는 “키가 작아 보여도 10살은 넘은 나무”라고 소개했다. 빨간 열매를 맺은 지리산 특산식물이자 산림청 지정 희귀식물인 ‘금강애기나리’도 사람의 발길이 닿는 탐방로를 비켜나 숨어 있었다. 햇볕 쬐는 걸 좋아하는 ‘흰참꽃나무’는 바람이 많이 부는 정상 부근 능선에서 살아남았다.

“구상나무는 죽어가는 게 일단 눈에 보이니까 관심이 많아요. 그런데 잘 보이지 않는 다른 특산식물들도 미래를 알 수 없어요.” 다시 평평한 땅을 밟을 때쯤 길희영 연구사가 부탁하듯 말했다. 국립수목원은 지리산 특산식물이자 세계자연보전연맹 적색목록(멸종위기)인 ‘물들메나무’가 기후변화가 심화할 경우 점점 고위도로 이동해야만 살 수 있다고 분석했다.

산청/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금강애기나리 열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금강애기나리 열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가문비나무.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가문비나무.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땃두릅.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땃두릅.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산부추.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산부추.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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