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현 국립중앙의료원장이 24일 오후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에서 ‘신종감염병 의료대응의 현실과 과제’라는 주제로 열린 ‘공공보건의료 강화를 위한 국회 연속 심포지엄’ 토론회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몇천억 기부금 들어왔다고 온갖 이해 관계자들이 불나방처럼 붙고 기획재정부는 기부금을 자기 돈인 양 검증하겠다고 나서는데, 보건복지부의 정책 의지는 실종이다.”
정기현 국립중앙의료원 원장이 24일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유족들이 국립중앙의료원에 7천억원을 기부한 뒤, 이 돈의 활용 방안을 둘러싸고 정부 안팎에서 부적절한 논의 흐름이 생기고 있다며 작심 발언을 꺼내놨다. 정 원장은 이날 서울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관에서 열린 ‘신종감염병 의료대응의 현실과 과제’ 토론회에서 축사하던 중 “감염병에 대한 의료대응 체계의 중심을 세워야 한단 고민 차원에서 한 말씀 더 드리겠다”며 고강도 발언을 이어갔다. 정 원장은 “지난해 하루라도 빨리 중앙감염병전문병원을 만들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한 것이 어느덧 공허한 약속으로 휴짓조각이 되어가고 있다”며 “행정이 중앙감염병전문병원이라는 근사한 건물을 껍데기처럼 지어놓고 생색낸다고, 으리으리한 건물 하나 더 만든다고, 음압병상 50개 더 늘어난다고 국가 감염병 대응 역량이 획기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 원장의 발언은 기부금은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 위기에서 환자 치료의 ‘컨트롤 타워’가 될 중앙감염병전문병원 건립 등 감염병 대응 체계의 수준을 근본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적절히 쓰여야 하는데, 그를 위한 논의는 제대로 시작도 되지 못한 상태에서, 기획재정부가 기부금을 이유로 내년도 예산안에서 건물 설계비를 전액 삭감하는 등 정부가 ‘예산 아끼기’ 정도로 대응하는 무책임한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복지부와 국립중앙의료원의 설명을 종합하면, 최근 기획재정부는 내년도 예산안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중앙감염병전문병원 구축사업 예산(설계비, 시설부대비) 2억5천만원과 국립중앙의료원 현대화사업 예산 10억원 등 관련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기부금이 들어왔으니 필요한 재원에서 정부 재정 부담을 줄일 수 있으므로, 재원 적정성 평가부터 다시 하겠다는 것이 기재부 쪽 논리라고 정부 관계자들은 설명했다.
정 원장은 또 “삼성 이건희 회장 기부로 세계 최고 수준으로의 건립을 약속한 중앙감염병전문병원은, 세계를 선도하는 감염병 대응 기관과 체계를 만들겠다는 정부의 정책 의지 위에서 가능하다”며 “그러나 지금은 행정이 의료를 압도해서 의학적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고, 이대로 중앙감염병전문병원이 설립된다면 그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건물 하나에 그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만 번들거리는 건물은 필요 없다”고 강조했다.
앞서 정 원장은 지난 5월에도 기자간담회를 통해 공공의료 체계 구축의 일환으로 정부가 책임지고 건립해야 하는 중앙감염병전문병원 건립이, 개인의 사회공헌에 기대야 한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내비쳤던 터다. 아울러 삼성이 7천억원 기부 의사를 밝혔을 때부터, 기부금이 생겼다는 것을 이유로 정부가 부담해야 하는 공공의료에 대한 재정 투자 등에 더 소극적이 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관련 전문가들 사이에서 적지 않았다.
이날 정 원장의 발언은 기부가 이뤄지고 석달여가 지나는 동안 그런 우려가 차츰 현실이 되는 것에 대한 우회적 항의 표시라는 해석이 나온다. 국립중앙의료원 관계자는 “7천억원의 기부금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논의하기 위해 국립중앙의료원이 공공보건의료와 감염병 분야 전문가들이 포함된 ‘기금운용관리위원회’ 구성안을 보건복지부에 제안했지만, 복지부가 이런 인선안을 확정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뤄 여태껏 구성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의료계 안팎에선 구체적인 이름과 함께 복지부 퇴직 관료가 이 위원회에 인선되어 기부금 운용을 좌지우지할 것이라는 우려 섞인 말들도 나오고 있다.
한상균 복지부 질병정책과장은 “당초 6월까지는 기금운용관리위 구성을 마치려고 했지만 논의 과정에서 좀 미뤄진 측면이 있다. 곧 구성을 완료할 것”이라며 “기부금이 들어온 뒤 재정당국에서 중앙감염병전문병원 사업 예산에 정부 재정이 기존 계획보다 적게 투입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재검토를 하고자 하는데, 국립중앙의료원과 논의하며 잘 협의해 가겠다”고 말했다.
최하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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