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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단독] 상사 괴롭힘에 숨진 ‘특고’ 캐디…법원 “회사도 배상”

등록 2023-02-19 11:23수정 2023-02-20 00:57

노동부, ‘특수형태고용종사자’ 이유로
“직장내 괴롭힘 맞지만 법 적용 곤란”
법원은 “가해자와 회사가 함께 배상”

건국대. 한국관광공사 제공
건국대. 한국관광공사 제공

“어제까지도, 흙탕물에 빠져서 앞이 보이지 않는 그런 꿈을 꿨어요.”

지난 15일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에서 만난 배아무개(38)씨가 말했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목숨을 끊은 동생의 손해배상 청구소송 선고 기일. 판결 내내 배씨는 긴장된 표정으로 눈물을 닦은 휴지를 꼭 쥐고 있었다. 동생에 대한 직장 내 괴롭힘을 인정하고 가해자와 회사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나자, 배씨는 그제야 미소를 보였다. 유족이 소송을 제기한 지 1년9개월 만, 배씨가 숨진 지는 2년5개월 만이다.

동생의 죽음 이후 배씨는 내내 ‘앞이 안 보이는 흙탕물’ 속에 있는 것 같았다. 2020년 9월 경기도 파주시 스마트 케이유(KU) 파빌리온 골프장에서 경기보조원(캐디)으로 일했던 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전에 이 골프장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고, 2019년 7월에 재입사 한 동생은 1년여 시간 동안 소위 ‘캡틴’이라고 불리던 상사 성아무개씨의 괴롭힘으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해왔다. 성씨는 다른 캐디도 들을 수 있는 무전으로 “뚱뚱해서 못 뛰는 것도 아닌데 뛰어라”, “네가 코스 다 말아먹었다” 등 외모를 비하하거나 공개적으로 질책하는 발언을 수시로 했다. 

배아무개(38)씨가 지난 2020년 경기 파주의 스마트 케이유(KU) 파빌리온 골프장 앞에서 직장 내 괴롭힘으로 죽음에 이른 동생 죽음의 진상을 밝혀달라며 시위를 벌이는 모습. 직장갑질119 제공
배아무개(38)씨가 지난 2020년 경기 파주의 스마트 케이유(KU) 파빌리온 골프장 앞에서 직장 내 괴롭힘으로 죽음에 이른 동생 죽음의 진상을 밝혀달라며 시위를 벌이는 모습. 직장갑질119 제공

동생은 스트레스로 평소 동료들에게 힘든 감정이나 “죽고 싶다”는 마음을 자주 표현했다. 2020년 8월엔 골프장 관리자가 있는 온라인 카페에 폭로 글을 올렸는데, 글은 20분만에 삭제되고 되레 동생이 카페에서 강제 퇴출당했다. 출근표·근무수칙 등 근무에 필요한 자료가 올라오는 온라인 카페에서의 탈퇴는 사실상 해고였다.

동생은 8월부터 수차례 자살 시도를 했다. 퇴사를 결심하고 집 정리를 위해 기숙사에 찾아간 날, 캡틴은 다시 한번 동생을 질책했다. 며칠 뒤 동생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생은 숨지기 전 유족에게 “(캡틴은) 나한테는 유독 심한 사람이였고, 내가 갈 곳 없는 거 알고 더 막 대하는 걸로밖에 안 느껴질 정도로 사람을 쥐락펴락해온 사람이야. 평생 그 사람 못 잊을 거야 아마”라고 괴롭힘을 호소하기도 했다.

고인이 사망 전 유족에게 보낸 문자. 판결문 내용 중
고인이 사망 전 유족에게 보낸 문자. 판결문 내용 중

배씨는 동생 유해를 싣고 고향 부산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이 사실을 처음 알았다. 직장에서 힘들어한다는 건 알았지만, 동생 핸드폰 속 일기는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일련의 괴롭힘과 회사의 방임에 대해 배씨는 힘든 싸움을 시작했다.

유니폼을 입고 정해진 업무를 따르고 열심히 일해온 동생이었지만, 회사는 동생의 죽음에 조의도 책임도 표하지 않았다. 캐디가 ‘노동자’가 아닌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고)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유가족은 회사의 책임을 묻고 사과를 받기 위해 골프장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했지만 회사는 “개인 간 갈등으로 일어난 일이다. 경찰과 노동부에 고발해라. 갑질이 밝혀지면 인정하겠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법적으로 노동자가 아니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사각지대에 있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싶었어요. 법이 그렇다는데…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동생이 노동자임을 입증하는 건 마치 ‘큰 산’에 부딪힌 것 같았다. 배씨는 그해 10월 중부지방고용노동청 고양지청에 직장내 괴롭힘으로 신고했지만, 고양지청은 “직장내 괴롭힘이 맞지만 관련 규정 적용은 곤란하다”고 판단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조항이 2019년 시행됐지만, 현행 조항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에게만 적용되기 때문에 특고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목숨을 끊은 캐디 배아무개(28)씨의 언니가 15일 의정부지법 고양지원에서 눈물을 닦은 휴지를 손에 꼭 쥐고 있다. 장현은 기자 mix@hani.co.kr
직장 내 괴롭힘으로 목숨을 끊은 캐디 배아무개(28)씨의 언니가 15일 의정부지법 고양지원에서 눈물을 닦은 휴지를 손에 꼭 쥐고 있다. 장현은 기자 mix@hani.co.kr

산업재해도 인정되지 않았다. 경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가 동생의 사망 원인이 ‘업무상 질병’이 맞다고 인정했음에도, 근로복지공단은 동생이 사망 두 달 전 ‘산재보험 적용제외 신청서’를 썼다는 이유로 산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괴롭힘이지만 법이 정한 괴롭힘은 아니고, 업무상 질병이지만 산재는 아니라는 모순의 연속이었다. 결국 유가족은 2021년 5월 “회사가 캡틴이 동생을 비롯한 캐디들을 괴롭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동생 등에 대한 보호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피고가 공동해 원고들에게 1억6000여만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

15일 의정부지법 고양지원 민사1부(재판장 전기흥)는 피고 성아무개씨와 골프장을 운영하는 학교법인 건국대학교를 상대로 유족이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대법원의 판결을 인용해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사람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켰다면 그 피해자가 반드시 근로자여야 할 필요는 없다”고 판시했다.

법원은 △성씨가 다른 캐디들도 들을 수 있는 무전으로 지시하면서 공개적 질책을 자주 한 점 △추가 질책을 피하기 위해 사실상 성씨에게 항의가 불가능했던 점 △인터넷 카페 글이 삭제되고 탈퇴당하면서 사실상 근무할 수 없는 상황이 된 점 등을 들어 성씨에게 민법상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했다. 법인에 대해서는 “배씨를 위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법인 소속 직원이 인터넷 게시판 글을 삭제하고 탈퇴시킨 점 등을 들어 성씨의 사무감독에 주의를 하였다고 보기 어렵다”며 불법행위에 대한 사용자 책임을 인정했다.

특고 노동자에 대해서도 직장 내 괴롭힘을 인정하고, 사용자가 주의 의무를 기울이지 않아 발생한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 사용자 책임을 인정한다는 취지다. 원고 대리인을 맡은 윤지영 변호사는 <한겨레>에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사망이라는 점을 인정했고, 가해자뿐 아니라 회사 책임을 인정한 점에서 의미 있는 판결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배씨는 이번 일을 겪으며 사각지대에 있는 노동자를 위해 새로운 꿈이 생겼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다른 세상 속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곳들 감독하고, 제대로 고치고 싶어요.” 배씨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지난해부터 노동법을 공부하고 있다. 동생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동부에 들어가서 현장을 바꾸는 일을 하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다. “앞으로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 노동자들이 똑똑하게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그런 참고 판례로 이번 판결이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장현은 기자 mi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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