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정 합의’ 공신력 추락
구속력 없어 정부도 뒷짐…또다른 노사 갈등 불러
구속력 없어 정부도 뒷짐…또다른 노사 갈등 불러
노사 갈등을 풀기 위해 정부가 나서 맺은 ‘노·사·정 합의’를 사용자 쪽이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조흥은행 노조는 19일 오후 서울 남대문로 본점에서 “조흥은행을 인수한 신한금융지주가 인위적 고용조정을 하지 않고, 통합은행 이름을 ‘조흥’으로 하기로 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노·사·정 합의서를 ‘휴짓조각’으로 만들고 있다”며 ‘합의 준수’를 요구하는 농성을 벌였다. 노조는 “사용자 쪽이 약속을 저버리는데도 정부는 팔짱만 끼고 있다”며 “총파업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사용자들의 부도덕한 행위에 맞서겠다”고 밝혔다.
앞서 2003년 6월, 당시 김진표 경제부총리가 중재에 나선 끝에 조흥은행의 최대 주주로 정부를 대표한 예금보험공사와 인수자인 신한금융지주 및 조흥은행, 전국금융산업노조 및 조흥은행 노조 대표는 △인위적 인원감축 중단 등 고용 보장 △통합은행 이름은 조흥 △제3의 인물로 통합추진위원장 선정 △두 은행 직원들의 직급조정 등 모두 10개항을 담은 합의문에 서명해, 조흥은행 노조의 파업사태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신한금융지주는 지난해 2월 조흥은행 직원 482명을 명예퇴직시켰다. 지난해 말엔 ‘제3의 인물’로 보기 힘든 신한은행 사외이사를 통추위원장으로 선임했다. 최근엔 통합은행 이름을 ‘신한’으로 결정하고 직급조정도 하지 않기로 했다. 지난해 인위적 인원감축 등 합의 파기에 항의하던 윤태수 조흥은행 노조위원장은 감금 및 폭력 혐의로 구속됐다.
신한금융지주 쪽은 그동안 “당시 상황이 급박해 (노·사·정 합의에) 참여했다”며 약속 파기의 구체적 이유를 밝히지 않아오다, 이날 밤 “기업 가치를 높이기 위해선 ‘합의’를 지킬 수 없었다”고 공식 해명했다.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격렬한 생존권 투쟁이 벌어졌던 전남 순천 현대하이스코에서도 ‘고용 보장’ 등을 약속한 노·사·정의 ‘확약서’가 버림받고 있다. 지난해 11월 조충훈 순천시장과 노사 대표 등 6명은 △민·형사상 문제 최소화 △실직 사내하청 노동자 우선 채용 등 5가지 약속을 담은 확약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크레인 점거 농성을 푼 노동자 120명 중 복직된 이는 31명뿐이었다. 이들마저도 현대하이스코 쪽이 복직한 업체와 도급계약을 해지하는 바람에 모두 다시 실직했다. 반면 회사 쪽은 공장 점검에 참여한 비정규직 노동자 61명에게 72억3000만원의 손배소송을 제기했다. 점거를 주도한 박정훈 노조위원장 등은 최근 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최근 대규모 파업이 벌어졌던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등에서도 노조원 징계 등 보복성 조처가 잇따르고 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이날 “노·사·정 합의가 아무런 근거 없이 일방적으로 파기되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참여정부가 표방한 ‘사회적 합의주의’의 실체를 다시 한 번 물을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이병훈 노무사 등 일선 전문가들은 “노·사·정 합의는 법적 구속력이 없다 해도 법 이상의 사회적 합의”라며 “사용자들이 자기 편의와 이해타산을 위해 이를 잇달아 파기하고 정부는 방관한다면, 더 큰 사회적 갈등과 비용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양상우 김성재 정대하 기자 y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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