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택배노동자 과로사 방지 대책을 발표한 12일 서울 시내의 한 택배 물류센터에서 직원들이 물품을 옮기고 있다. 연합뉴스
하루 평균 12.1시간을 일하고, 한달 평균 4421건의 물품을 배송한다. 하지만 20여년 전 건당 1200원(2002년 기준)을 받았던 배송수수료는 세월이 흘러 오르기는커녕 지난해 800원까지 내리 곤두박질쳤다. 코로나19의 ‘숨은 영웅’이란 수식어 뒤에 장시간 노동과 그로 인한 과로에 내몰린 택배기사들은 올해만 벌써 10명이 목숨을 잃었다.
12일 정부가 발표한 택배기사 과로방지 대책은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수고용직) 신분이기에 주 52시간제 등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못했던 택배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 제한과 산재보험 확대 등이 주된 내용이다. 사회안전망 사각지대에 놓인 택배기사들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업계의 불공정 계약 관행, 이로 인한 낮은 배송수수료 문제 등 산업 전반의 구조적 문제를 지목해 대책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종전보다 진전된 조처로 보인다.
하지만 심야배송 제한 권고와 주 5일제 근무 확산 유도 등 상당수 내용이 강제성이 없고 ‘권고’와 ‘유도’ 등 모호한 수준에 그쳤다는 지적이 나온다. 택배기사의 노동시간을 단축하려면 인력 충원이나 설비 자동화가 필요한데, 일정 부분 정부의 예산 지원이 있더라도 이조차 부담하기 어려운 업체들은 개선 없이 기존의 분류·배송업무 방식을 고수할 가능성이 크다. 주무 부처인 고용노동부도 “택배사가 심야배송 제한 등 작업체계 조정 시스템을 마련하지 않은 경우 택배전용차 증차를 규제하는 식의 관리는 하겠지만, (민간기업의 대책 이행을) 100% 강제할 순 없다”고 밝혔다.
주간 택배기사들의 심야배송 마감시간 예시를 밤 10시로 든 것에서도 정부가 장시간 노동에 대한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는지 의문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는 이날 성명에서 “장시간 노동을 줄이고 제도 개선을 마련해야 할 노동부 장관이 밤 10시까지 일하는 것에 대해 적정 작업시간이라고 언급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처사”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공짜 노동’으로 불리며 하루 3~4시간 이상씩 택배기사들이 하고 있는 분류작업은 장시간 노동을 유발하는 핵심 쟁점인데, 정부 대책은 외려 후퇴한 모양새다. 지난달 씨제이(CJ)대한통운과 한진택배는 택배기사 과로사 방지 대책으로 전담인력 투입을 발표하며, 분류작업에 대한 원청회사의 책임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날 대책에서, 분류작업 문제는 노사 간 이견이 크기 때문에 의견수렴을 거쳐 관련 내용을 표준계약서에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김세규 전국택배연대노조 교육선전국장은 “이미 택배사들이 분류작업의 책임을 인정해 인력 투입까지 한 상황에서 정부가 논의를 원점으로 돌려버린 셈”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산업안전보건법 등 관련 법규의 개정을 통해 택배사에 안전·보건 조치 의무를 부여하고, 대리점에 택배기사에 대한 건강진단 실시 의무도 부과하겠다고 이날 밝혔다. 하지만 보험료 부담 문제를 어떻게 풀지 등에 대한 언급은 빠져 있어, 한계를 드러냈다.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의 산재보험료는 사업주가 전액 부담하지만, 특수고용직은 본인과 사업주가 절반씩 부담한다. 한국노총은 “전속성 폐지를 전제로 특수고용직 산재보험료를 100% 사업주가 부담하게 하는 등 이들의 고용형태를 고려한 개선 방안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실제 택배기사의 장시간·고강도 노동을 줄이기 위해선, 다음달 노·사·정 참여로 꾸려지게 될 ‘택배기사 과로방지 대책협의회’(가칭)의 역할이 관건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조은 참여연대 노동사회위원회 선임간사는 “정부 대책의 실효성을 높이려면 택배사 한두곳의 택배수수료를 높이거나 자체적인 노동시간 제한 정책을 내놓는 방식으론 안 되고, 택배업체 전반의 합의를 이뤄내야 한다”며 “이를 위해선 사회적 기구에서 정부의 적극적인 중재와 개입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선담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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