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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약자 보도피해 소송은 높은 산…“구제기구·지원 강화를”

등록 2021-09-10 00:19수정 2021-09-10 10:29

②피해구제 실효성 높여야

“자기들(ㄱ신문)이 기사를 쓰고 싶으면 쓰고, 그건 언론의 자유일지 모르겠는데, 우리를 속이고 이용한 건 잘못한 거잖아요.”

시민단체 ‘성소수자부모모임’에서 활동하는 지인(활동명)씨의 말이다. 지난해 9월 ㄱ신문은 성소수자부모모임에 ‘성소수자 인권을 위한 기사를 쓰겠다’는 내용으로 취재요청서를 보냈다. 게이 아들을 둔 지인씨와 트랜스젠더 아들을 둔 다른 회원 한명이 인터뷰에 응했다. 하지만 ㄱ신문은 ‘탈동성애 치료’ 필요성을 주장하는 혐오 보도 속에 두 사람의 인터뷰와 사진을 끼워 넣었다. ‘자녀가 성소수자인 걸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괴로웠다’는 내용만 갖다 썼다.

언론사가 애초 요청한 인터뷰 취지와 180도 다른 보도를 확인한 뒤, 지인씨를 비롯한 단체 구성원들은 “충격과 분노, 모욕감에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받았다. 곧바로 취재기자, 데스크(간부)들에게 항의했다. 하지만 ‘정정보도 및 사과문’ 요청에 미온적으로 대응하던 보도 책임자들의 태도가 “적극적”으로 바뀐 건, 성소수자부모모임이 법원에 손해배상 등을 청구하는 소를 제기한 뒤다. 보도가 나간 지 8개월이 지난 올해 5월에야 △언론사 누리집에서 지면신문 내용 삭제 △사과문 게재 △위자료 일부를 지급하는 조정 합의가 이뤄졌다. 소송·조정 비용은 각자 부담하기로 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도 “언론사를 이겨봤자 실제 당한 피해를 회복하긴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허위·왜곡보도를 더 견딜 수 없어서” 언론인권센터의 도움을 받아 2016~2018년 5개 언론사를 상대로 정정보도·손해배상 청구 싸움에 나섰다. 이종란 반올림 활동가는 “(반올림에 확인)전화 한 통 하지 않고 기사를 쓴 곳이 수십군데에 이르렀는데, 소송 비용 문제 등을 고려해 왜곡 정도가 심한 언론만 고른 것”이라며, “단체의 시간적·재정적 여력이 부족했지만, 산재 피해자들이 기사 내용을 믿고 반올림을 의심하는 등 피해가 심각해서 반드시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법원은 4개 언론사의 일부 허위보도·모욕행위를 인정하고 200만~1000만원씩 각각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허위·왜곡보도 피해 심각해도

정정보도·사과요청 무시 일쑤

손배해상 금액 대비 부담 커

사회적 약자들엔 문턱 높아

더불어민주당이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언론중재법) 개정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명분은 잘못된 언론 보도로 인한 피해 구제 강화가 핵심이다. 앞서 사례에서 보듯, 허위 왜곡 보도로 고통받은 피해자들이 사실을 바로잡거나 응분의 배상을 받거나 충분한 사과를 받는 일은 멀고도 험난한 것이 사실이다. 법은 멀고 언론의 벽은 높다.

과연 기존의 법 적용과 제도로는 이런 폐해를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일까.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한 언론중재법 개정안으로 피해 구제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민주당이 ‘손해액의 5배 이내까지’ 손해배상 판결을 할 수 있도록 언론중재법을 개정하려는 근거는, 현재 피해자가 지불해야 할 변호사 선임 비용을 포함한 소송 비용·시간에 견줘, 손해배상 금액이 충분하지 않다는 현실에 있다. 언론중재위원회가 낸 ‘2019년 언론 관련 판결 분석 보고서’를 보면 손해배상 인용액 중 500만원 이하의 비중이 전체 판결의 53.8%를 차지한다.

하지만 다수 전문가들은 현재 개정안대로 법을 손보더라도 손배액 상향 효과는 미미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김영욱 카이스트 과학저널리즘대학원 초빙교수는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도입되더라도 ‘고의로 허위의 사실을 보도한 경우’에 한해 손배액이 높아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손배액을 높일 순 있지만 적용되는 경우는 매우 제한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언론사의 고의·중과실이 입증되어야 하는 탓이다. 또한 기존 언론중재법도 “손해액에 상당하는” 손배액을 산정하도록 했지만 법원의 상향 움직임은 더디기만 하다.

이에 현행 시스템을 활용해 적극적으로 판단·대응하는 것이 언론 피해 구제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의견이 많다. 헌법재판소 연구관 출신인 노희범 변호사는 “언론이 지금까지는 ‘갑’이어서 사법적 구제 절차에서 피해자를 많이 보호하지 못했다. 판사들이 언론 보도 피해에 대한 손배 소송 때 적극적인 판결을 통해 ‘갑을’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지금의 손해배상·명예훼손죄 법리만 적극적으로 활용해도 악의적 보도의 피해를 방지할 수 있다”고 했다. 심석태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는 “대법원이 특별연구반을 만들고 언론 불법행위 사건의 손배액 산정에 대한 구체적·합리적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화된 손배액 적용 제한적이고

잘못된 보도 신속차단도 어려워

혐오표현·2차피해 등 대책 필요

“강력한 통합 자율규제기구 논의”

언론중재법 개정의 또 다른 근거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1인미디어 플랫폼 활성화 등 미디어 환경 변화로 언론보도 피해 구제의 신속성, 효율성을 높여야 하는 현실이다. 언론 피해자 법률지원을 하는 언론인권센터의 윤여진 상임이사는 “언론이 신상을 가려서 보도해도 누리꾼들이 밝혀내 디지털에 전파하며 피해가 빠르게 확산하는 패턴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수 전문가는 현재 개정안에 담긴 ‘기사 열람차단 청구권’이 이러한 현실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진단한다. 열람차단 청구 또한 언론사와 협의가 필요해, 언론사가 거부하면 소송으로 이어지는 탓이다. 대신 윤 상임이사는 “이미 존재하는 피해 구제 기관들 사이에 협업이 유기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게 시급하다”고 말했다. 배우 ㄱ씨는 2018년 대법원이 가해자에 대한 성추행 유죄판결을 내린 뒤에도 지속되는 언론과 1인미디어의 2차 가해 때문에 언론인권센터를 찾았다. 언론인권센터는 언론을 상대로 한 소 제기는 물론, 검경 수사기관,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네이버티브이(TV), 판도라티브이, 유튜브 등 각종 피해 구제 창구를 접촉해야 했다. 피해 구제 관련 기관들이 피해자 입장에서 구제 절차를 더 빠르고 간소하게 할 수 있는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9일 국회 제5회의장에서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언론중재법)' 개정안 여야 협의체 회의가 열리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 국민의힘 최형두, 전주혜 의원, 문재완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송현주 한림대 미디어스쿨 교수, 김필성 변호사, 더불어민주당 김용민, 김종민 의원. 신희석 연세대 법학연구원 박사는 참석하지 않았다. 국회사진기자단
9일 국회 제5회의장에서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언론중재법)' 개정안 여야 협의체 회의가 열리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 국민의힘 최형두, 전주혜 의원, 문재완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송현주 한림대 미디어스쿨 교수, 김필성 변호사, 더불어민주당 김용민, 김종민 의원. 신희석 연세대 법학연구원 박사는 참석하지 않았다. 국회사진기자단

언론·시민단체와 학계 전문가들은 실질적인 보도 피해 구제 강화를 위해서는, ‘허위표현 처벌’에 맞춰진 현재 개정안의 방향 자체가 ‘혐오표현 대응’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본다. 김동찬 언론개혁시민연대 정책위원장은 “우리나라는 명예훼손, 모욕 등 개인의 인격권을 보호하는 처벌 제도는 많은데, 소수자 집단에 대한 보호는 사실상 사각지대”라며, “언론 피해 구제에 있어서도 사회적 약자를 위한 아동인권과 젠더 관점에 기초해서 새 제도 도입의 필요성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동욱 동국대 법과대학 교수도 “여성·아동 범죄 피해자는 언론 보도로 인한 2차 피해 정도가 심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부가 피해자 소송 비용을 지원한 뒤 언론사가 패소했을 때 구상권을 청구할 수 있는 규정을 언론중재법 개정안이나 범죄피해자보호법에 마련하는 방법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사법 기구의 역할을 늘리기보다, 언론계 자율규제 실효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앞서 ‘저널리즘 윤리위원회’(가칭) 구성을 제안했던 전국언론노동조합 등 언론인 현업 단체들은, 지난 2일 언론 사업자 단체들과 만남을 하는 등 “강력한 통합 자율규제 기구”를 위한 첫발을 뗀 상태다.

김효실 조윤영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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