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녀 피티아가 예언을 해 그리스 세계를 움직였던 파르나소스산 델피의 아폴론 신전 터. 델피/조현 기자
[조현의 그리스 종교기행] ④ 누가 우리 운명을 결정하는가
우리가 한 달 뒤, 또는 1년 뒤의 삶과 운명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미래만 안다면 불운을 피하고, 복만 챙길 수 있을까. 운동경기와 선거의 승패도 뒤집고, 주가를 예측해 떼돈도 벌 수 있을까. 그런 예언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최고의 예언능력’을 지녔다는 아폴론신을 대신한 무녀(巫女) 피티아가 미래를 여는 비밀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에서 피티아는 지금의 교황이나 달라이 라마 못지않은 명성을 누렸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발휘한 영향력만 따지면 피티아가 이들을 훨씬 능가했다.
피티아는 그리스인들이 ‘세상의 중심인 지구의 배꼽’이라고 믿는 옴팔로스가 있는 파르나소스산 동쪽 기슭 델피(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머물렀다. 아테네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170㎞ 지점. 펠로폰네소스반도와 본토를 가르는 바다를 지나 설산의 손짓을 따라 델피의 고원으로 오른다. 바다에서 델피까지는 시야가 아득해질 만큼 드넓은 올리브나무 숲이 펼쳐져 있다. 올리브는 지중해 세계인들에게 생명수다. ‘모두를 살리는’ 생명수가 올리브다. 그러나 너와 내가, 내 나라와 네 나라가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금은보화를 싸들고, 이 고원을 올랐을 리는 없다. 나와 내 쪽이 승리하리라는 신탁을 얻으려 이 길을 달렸을 이들에게 ‘올리브’가 보였을 리 만무하다.
알렉산드로스도, 키케로도
‘지구의 배꼽’ 옴팔로스 찾아
예언자 피티아에 운명 물어
그녀의 답은 “천성대로 살아” 고즈넉한 산간마을 델피에서 10분 정도 걸으면 아폴론 신전 터가 있는 험준한 산이 위태롭게 서 있다. 90도 이상의 직각 경사로에 바위들이 불규칙하게 얹혀 있다. 거대한 바위가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아폴론이 이곳에 살던 괴물 여신 피톤을 죽인 뒤 아폴론을 숭배하는 성소가 되었단다. 과연 괴물이 살 만한 협곡이다. 많이 허물어지긴 했지만, 25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우뚝 서 있는 신전의 기둥과 극장 터가 옛 위용을 말해준다. 신전 터 입구에 팽이 모양으로 1m 높이의 옴팔로스가 있다. 이 보잘것없는 것이 지구의 배꼽이라니. 하지만 그리스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곳이었으니 세상의 중심이었음에 틀림없다. 실제로 이곳 무녀의 말 한마디는 그리스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다. 아테네가 페르시아대군과 맞설 때도,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왕이 300명의 전사를 이끌고 테르모필레 협곡으로 나아갈 때도, 알렉산드로스가 동방 침략에 나서기 전에도, 이곳에서 아폴론 신에게 자신들의 명운을 먼저 물었다. 무녀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을 놓고 해석하며 나라마다 전쟁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떤 전략을 구사해야 할지, 신의 뜻은 과연 무엇인지를 놓고 살 방도를 마련하곤 했다. 그런데 과연 무녀의 예언 능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19세기부터 신전을 발굴한 과학자들은 피티아가 머물렀던 방인 ‘아디톤’과 그곳에 놓여 있던 옴팔로스를 주목했다. 그리고 이 일대를 세심히 조사해 단층과 지형을 수십년간 분석한 결과 당시 여사제가 지층에서 올라오는 증기를 흡입했는데, 이 증기는 가스층에서 올라와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에틸렌 성분을 지녔다고 보고했다. 땅속에서 흘러나오는 아폴론의 ‘신비한 성령’이 실은 환각가스였다는 것이다. 환각가스를 마신 피티아가 지중해 세계에서 권력자들과 국가의 운명을 점치고 결정했다면 ‘이성’의 출발지라는 그리스 세계에 대한 믿음을 지속해야 할까. 비가 흩뿌린다. 관람객들이 급히 아래쪽으로 내려가 박물관으로 들어가 비를 피한다. 하지만 아폴론 신전 옆 자그만 홈에 앉아 졸았다. 옛날과 같은 가스는 나오지 않지만 졸음을 환각제로 삼아 여사제의 춤사위 속으로 들어가본다. 비를 피해 앉아 조는 비몽사몽간에 30여분이 지났다. 그러다 비가 그치더니, 축복 같은 햇살이 쏟아지며 정신은 안개가 걷힌 듯 맑아진다. 이제야 배가 고프다. 신전의 옴팔로스를 뒤로하고 찾아간 곳은 델피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기로스 피타집이다. 우리 돈 3천~4천원 정도로 싸면서도 눈물 나게 맛있는 집이다. 비가 올 때는 비를 피할 곳이 나의 중심이더니, 배고플 때는 이 집이 나의 중심이다. 그런데 어디에서 중심을 찾고, 어디에서 내 운명을 구할 것인가. 그러나 환각에 취한 신녀에게서 나온 신탁 중에서도 한마디만은 잘 새겨듣고 싶다. 로마의 웅변가이자 정치가인 키케로(기원전 106~43)가 피티아를 만나 “어떻게 하면 큰 명성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신녀가 모처럼 지금도 귀에 담을 만한 신탁을 해주었다. “당신 천성대로 살아야지, 다른 사람들에게 휘둘려서는 안 된다.”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전문과 사진은 휴심정(well.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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