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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교

바쁜 세상 느긋하게…에피쿠로스 ‘자족의 삶’으로

등록 2012-08-15 20:35

피타고레이온 항구의 피타고라스 동상.  사모스/조현 기자
피타고레이온 항구의 피타고라스 동상. 사모스/조현 기자
[조현의 그리스 종교기행] ⑦ 사모스: 어떻게 세상 중심지가 되었나
피타고라스·헤라 고향이며
이솝·에피쿠로스 숨결밴 곳

‘나는 무엇을 한 것인가’
피타고라스 음성 뒤로하고
푸른 바다와 현자들 면면
느리게 돌아보아도 눈이 시려

아테네를 떠나면 에게해다. 그리스 본토와 터키 사이에 펼쳐진 드넓은 바다다. 이 바다의 이름은 바다에 몸을 던진 아테네 왕 아이게우스를 땄다. 크레타섬 미궁의 괴물에게 조공으로 바쳐진 소년 소녀 7쌍을 구하러 간 아들 테세우스가 거사에 성공하고도, 승리의 흰 돛을 달고 오겠다는 약속을 잊고 검은 돛을 단 것을 보고 ‘성급히’ 죽은 왕이다. 그래서 에게해에선 성급해선 더욱 안 될 일이다. 하지만 느리게 돌아도 눈이 시리다. 너무도 푸른 바다와 화려한 신들과 문명과 현자들의 면면에.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고향인 크레타섬은 제우스의 탄생지다. 또한 유럽 문명의 시원이다. ‘유럽’은 제우스가 보쌈해서 이 섬으로 데려온 ‘에우로페’가 어원이다. 제우스와 에우로페 사이에서 미노스가 태어난다. 그가 바로 미노아 문명(기원전 3650~기원전 1170)을 연 전설상의 인물이다.

크레타섬에서 쾌속선으로 두 시간 거리엔 ‘사라진 대륙 아틀란티스’일지도 모른다는 산토리니가 있고, 조그만 섬 코스는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가 태어나 의술을 펼친 곳이다. 파트모스는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저술한 곳이다. 외부세계와 단절되기 십상인 섬들이 어떻게 세상의 중심 인물의 활동지가 될 수 있었을까. 오디세우스의 탐험기와 아르고호 원정기를 듣고 읽으며 바다를 닫힌 벽이 아니라 열린 길로 여긴 사고의 지평 덕이리라.

에게해 섬들을 유랑한 지 일주일 만이다. 사모스섬의 피타고레이온 항구다. 스스로를 최초로 철학자로 부르고, 지금까지도 교과서를 장식하는 수학자이자, 음악 7음계의 창시자인 피타고라스의 고향이다. 삼각형을 가리키는 피타고라스의 동상이 서 있다.

사모스섬이야말로 세상의 중심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신들의 여왕인 제우스의 부인 헤라의 고향이자 <이솝 우화>의 그 이솝(아이소포스)과 ‘쾌락주의자’로 불린 자족주의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살았던 곳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모스 연구>라는 책을 쓸 만큼 주목하던 곳이다.

피타고레이온 인근 분지는 헤라가 태어난 곳에 지어졌다는 거대한 헤라 신전 터다. 평화로운 곳이다. 폭풍 같은 헤라의 질투와 시기는 순전히 바람기 많은 제우스로 인한 것이리라.

사모스섬의 대표 인물은 뭐니 뭐니 해도 피타고라스인데, 유물은 없다. 유일한 흔적이 그가 도를 닦았다는 ‘피타고라스 동굴’이다. 한국에서도 원효 대사를 비롯한 옛 도인들이 수도했던 동굴들을 샅샅이 찾아다니던 내가 어찌 이 동굴에 오르는 노고를 마다하겠는가.

택시 기사에게 그 동굴을 물으니 “안다. 노 프로블럼(문제없다)”이란다. 통상 100유로 받는데, 비수기니 80유로만 받겠단다. 다음날 아침 7시 예약택시를 타고 출발. 40여분 동안 몇 개의 고개를 넘더니 어느 해안가 마을에 이른다. 그러고는 마을 사람에게 길을 묻는다. 60 평생 이 섬에 산 그도 초행이었던 셈이다. 산길은 1천m쯤 시멘트포장이 되어 있더니, 그다음엔 울퉁불퉁한 돌들이 삐져나온 험로다. 말수 없던 택시기사가 “프로블럼, 프로블럼”(문제다, 문제야)이란다. 이런 산길을 3~4㎞ 가니 막다른 곳이다.

험준한 바위산을 300~400m쯤 오르니, 철문이 달려 있다. 더 오르니 동굴이 보인다. 겉에서 보기보다 내부가 상당히 크다. 10여명도 너끈히 지낼 수 있을 성싶다. 그 옆에 다른 동굴이 있다. 그런데 동굴 안쪽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다. 안쪽은 위험하니 허가 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고 돼 있다. 어둠 너머로 보니 깊은 물웅덩이다. 용이나 구렁이나 다른 괴물들이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 같은 섬뜩한 어둠 속이다.

이 동굴의 아우라가 말해주듯이 피타고라스는 장막 뒤에서 말했다. 추종자들은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말만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인도의 석가와 같은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가 만든 피타고라스 공동체는 엄격한 계율과 채식, 절제가 기본이었다. 3년 동안 이런 과정을 거치고 5년 동안 침묵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그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도 엄격한 배제의 원칙이 이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화근이 되었다. 피타고라스가 이탈리아에 이주해 운영한 피타고라스 공동체의 입회를 거절당한 시바리스의 왕자 키론이 앙심을 품었다. 그는 시민들을 선동해 공동체를 붕괴시키고 피타고라스를 죽였다.

피타고라스는 제자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다음과 같은 충고를 했다. 자기 집에 들어갈 때마다 `어디에서 나는 길을 벗어났는가. 나는 무엇을 한 것인가. 또 해야 할 일 가운데 무엇을 하지 못했는가’라고 소리내어 말하라.

동굴에서 장막 속의 피타고라스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하지만 나는 에피쿠로스처럼 자족하고 싶다. 피타고라스까지 나서지 않아도 지금 세상은 너무나 달리고 있다. 나도 스스로를 달달 볶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곱추이자 노예였던 이솝의 ‘토끼와 거북이’를 생각하면서, 느긋하게 에게해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싶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고.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전문은 휴심정(we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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