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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교

3천년의 경고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목마’를 찾는다

등록 2012-08-29 19:42

터키의 소도시 트루바의 고대 트로이성 유적지에서 관광객들을 맞고 있는 ‘트로이의 목마’.
터키의 소도시 트루바의 고대 트로이성 유적지에서 관광객들을 맞고 있는 ‘트로이의 목마’.
[조현의 그리스 종교기행] ⑧ ‘일리아드’의 무대 트로이-누가 속이는가
차나칼레 항구 가장 목좋은 곳
트로이를 멸망시켰던 그 목마
가짜임에도 최고의 인기 구가

‘트로이 목마’는 갈수록 생명력
이라크에서 사이비종교에서
보험과 금융사의 광고에서

에게해를 동쪽으로 건너면 지금은 터키 땅이다. 고대엔 소아시아도 그리스 세계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와 이를 바탕 삼은 영화 <트로이>의 주무대인 트루바는 터키 차나칼레 항구에서 20여㎞ 떨어져 있다.

숙소 이름이 ‘헬렌’이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사랑에 빠져 트로이전쟁의 발단이 된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나를 딴 것이다.

트루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목마’다.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가 그리스의 전사 아킬레우스의 손에 죽고서도 결코 함락되지 않던 철옹성을 무너뜨린 바로 그 꼼수의 대명사다. 모사꾼 오디세우스가 그리스군이 모두 퇴각한 것처럼 꾸미고, 특공대원들을 숨겨 트로이성 안에 잠입시켜 트로이를 멸망시켰다는 목마를 재현했다. 목마 속에 오디세우스와 아킬레우스 등이 숨어 있다는 걸 모르는 트로이에선 ‘신의 선물’이라며 성 안으로 끌어다놓고, 진탕 마시며 축제의 밤을 즐기다가 한밤중에 날벼락을 맞았다.

그날 밤 처참하게 불태워져 무너져 내렸던 돌성이 나타난다. 가로 180m, 세로 35m, 높이 18m의 돌성이다. 상당 부분이 허물어졌다지만, 튼튼한 성이다. 풀숲을 지나면 간간이 돌무더기들과 돌층계들이 모습을 나타난다. 6㎞ 떨어진 에게해 해안까지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다.

치타처럼 날랜 아킬레우스와 그의 전사들이 달려와 신전을 헤집어놓자, 뒤늦게 달려온 심복은 “아폴론 신을 모독하면 진노를 살 것”이라며 두려워한다. 그러자 아킬레우스는 아폴론 상의 목을 가차없이 칼로 두동강 내버린다. 시원하게. 그러나 그건 영화일 뿐이다.

실상 <일리아드>에 그려진 트로이전쟁은 신들의 꼭두각시놀음에 불과하다. 아킬레우스는 마마보이 면모까지 보인다. 칭얼대는 그를 위해 그의 어머니인 물의 신 테티스가 제우스를 움직여 전쟁을 좌지우지한다.

이 전쟁에선 테티스뿐 아니라 헤라와 아테나, 포세이돈이 그리스연합군 편이 되고, 트로이군 편인 아폴론과 전쟁의 신 아레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양쪽으로 나뉘어 북 치고 장구 친다. 인간들은 왜 갑자기 전세가 불리해지고, 힘이 쏙 빠져 상대의 칼과 창에 맥없이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죽어갈 뿐이다. 호메로스는 이렇게 신의 영광만을 드높였다.

트로이의 옛 유적지 위에선 신들의 핏빛 칼날에 사라져버린 넋인 듯 꽃들이 더욱 붉다. 19세기에 이 유적지를 발굴했을 때 성채엔 매장되지 않은 유골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트로이성 멸망 후 화근의 싹을 제거하려는 잔인한 오디세우스에 의해, 헥토르의 어린 아들은 불구덩이에 던져졌다. 그리고 부인 안드로마케는 전후 분배에서 아킬레우스의 아들에게 주어져 끌려간다.

과연 누가 승자인가. 오직 명예와 복수를 위해 싸우는 아킬레우스도 죽었고, 국가와 가족을 위해 싸운 헥토르도 죽었다. 에게해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항해에 앞서 자기 딸을 바다의 신에게 던져주고 온 총대장 아가멤논도 결국 고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딸을 죽인 데 앙심을 품은 아내에 의해 살해됐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채 약자들만 죽음으로 내모는 현대의 강자들보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하며 직접 싸우다 죽은 왕족들의 책임 의식만은 높이 사줘야 할까.

‘전설 따라 삼천리’에나 나오던 ‘트로이’를 역사로 만든 건 독일인 늦깎이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이다.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슐리만은 크리스마스 때 선물로 받은 <일리아드>를 읽은 감동을 잊지 못하고 신화 속 트로이를 찾아낼 꿈을 꾸었다. 그는 훗날 사업가로 대성한 뒤 46살부터 어린 시절의 꿈을 찾아 3년간 일꾼 100여명과 함께 37m 높이의 언덕에서 1t 트럭 25만대분의 흙을 파냈다. 그렇게 흙을 파 트로이뿐만 아니라 켜켜이 무려 9개층으로 쌓인 역사 아래 역사들을 세상에 드러냈다.

그도 목마는 찾아내지 못했지만, 어느새 목마는 가짜임에도 어떤 유적보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트로이인의 생명과 보물을 남김없이 앗아간 목마는 이제 현대판 상업광고처럼 관람객들을 유혹한다. 트로이성 유적지 말고, 차나칼레 항구에도 영화 <트로이> 제작사로부터 기증받았다는 거대한 ‘트로이의 목마’가 가장 목 좋은 해안에 전시돼 있다.

사진을 찍어줄 사람을 찾아 두리번거리니 목마 앞 벤치에 앉은 한 여자가 활짝 웃으며 바라본다. 헬레나의 화신인 듯 아름다운 여자가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미소를 짓는다. 목마 주위에 ‘꽃뱀’들이 적지 않다는 사전 정보가 없었다면, 이게 웬 ‘신의 선물’이냐고 좋아했으려나.

신화 속에서 나온 ‘트로이의 목마’는 갈수록 생명력을 발한다. 실체가 없는 대량살상무기를 찾는다며 애국과 정의의 이름으로 5만여명을 죽음으로 내몬 이라크에서, 나만이 축복을 줄 수 있다는 사이비 종교에서, 내가 바로 당신의 미래를 책임진다며 주머니를 노리는 보험과 금융사의 광고에서.

그래도 차나칼레에서 ‘트로이의 목마’를 찾는 사람들은 날로 늘고 있다. 3천년간의 경고에도 여전히 ‘신의 선물’일지 모른다면서. <끝>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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