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 국민연금공단 서울북부지역본부 민원실 모습이다. 연합뉴스
윤석열 정부가 보험료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방향성만 담긴 국민연금 개혁안을 내놨다. 보험료율을 중장년층은 단기간, 청년층은 장기간에 거쳐 조금씩 차등 인상하겠다면서도 얼마나 올릴지, 연금을 받기 시작하는 수급개시 연령 조정 등은 어떻게 할지 등 ‘모수 개혁’은 빠져 맹탕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보건복지부는 27일 국민연금심의위원회를 열어 이런 내용이 담긴 ‘제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을 심의했다. 복지부 장관은 국민연금법에 따라 5년마다 국민연금 재정수지를 계산하고, 이를 바탕으로 연금 보험료 조정을 포함해 국민연금 운영 전반에 관한 계획을 세워 그해 10월까지 국회에 제출해야 한다.
이날 발표에서 보험료율은 ‘세대별 보험료율 차등 인상’이라는 방향성만 제시됐다. 같은 보험료율을 인상하되, 앞으로 보험료를 내는 기간이 적은 중장년층은 단기간에 올리고, 가입 기간이 긴 청년층은 장기간 올려 인상 부담을 더는 방식이다. 정부는 1998년부터 월 소득 대비 9%인 보험료 인상 수준을 놓고서도 “공론화를 통해 구체화하겠다”며 정부 안을 내지 않았다.
얼마나 받을지 가늠하는 명목 소득대체율은 “계속 검토하겠다”고만 언급됐다. 명목 소득대체율은 40년 보험료를 냈을 때 가입 기간 평균 소득 대비 연금액 비율로, 2008년 50%에서 해마다 0.5%포인트씩 내려가 2028년 40%(올해 42.5%)까지 감소한다. 국민연금을 38년 납부해도 소득대체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인 42.2%보다 낮은 31.2%에 그치는 만큼, 노동·시민·사회단체에선 소득대체율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왔다. 그러나 복지부는 기초연금·퇴직연금 등 구조개혁 논의와 연계해 의견을 수렴하겠다는 입장이다.
연금을 받기 시작하는 나이(수급 개시 연령) 조정에 대해서도 복지부는 추후 논의하기로 했다. 올해 63살에서 2033년 65살까지 늦춰지는 수급 개시 연령을 더 늦추면 법정 정년 60살 시대에 은퇴 이후 소득 공백 기간이 길어져 고령자 계속 고용 여건이 성숙한 이후 논의하자는 것이다. 현재 59살까지인 국민연금 의무 가입 상한 연령도 함께 조정 방안을 논의한다.
윤석열 정부 국정과제인 기초연금 월 40만원 인상(올해 32만3180원)도 국민연금 개혁과 연계하기로 해 인상 시기나 방법은 명시하지 않았다.
복지부는 대신 국민연금 가입 기간을 늘려 실질 연금액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정부가 보험료를 50%까지 지원해 가입 기간을 늘려주는 ‘지역가입자 보험료 지원제도’ 대상을 확대한다. 지금은 사업중단·실직·휴직 등으로 보험료를 의무 납부하지 않다가 다시 내기 시작한 ‘납부 재개자’만을 지원하는데, 일정 소득 수준 이하 저소득 지역가입자로 대상을 넓히고 지원 기간도 현행 12개월에서 더 늘리기로 했다. 둘째 자녀 출산부터 국민연금 가입 기간으로 인정하는 출산 크레딧은 첫째 자녀 출산과 동시에 12개월 가입 기간을 늘려주고, 군 복무 크레딧 인정 기간도 현재 최대 6개월에서 전체 복무 기간으로 확대한다.
국민연금을 국가가 지급 보장한다는 법적 근거도 더 명확하게 고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국가는 연금급여가 안정적·지속적으로 지급되도록 필요한 시책을 수립·시행하여야 한다’는 현행 국민연금법(제3조의 2) 개정을 추진한다.
정부 안의 밑그림이 된 복지부 산하 제5차 재정계산위원회(재정계산위)가 제시한 방안 가운데 기금 수익률을 1%포인트 인상하는 방안만 정부 안에서 구체화했다. 지난해 기준 47.9%인 국외 투자 비중을 2028년 60%까지 늘리겠다는 방안이다. 앞서 재정계산위는 보험료율 인상(12%·15%·18%), 수급개시연령 조정(65살·68살), 예상 기금 수익률(4.5%·5%·5.5%) 등을 조합한 18개 방안과 소득대체율 인상에 따른 6개 재정 전망을 최종 보고서에 담았다.
복지부는 이날 심의한 정부 안을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31일까지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종합운영계획은 연금 개혁을 위한 본격적인 논의 시작점이 될 것”이라며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와 공론화를 통해 구체적인 개혁안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모수 개혁이 빠진 정부 안을 두고 전문가와 시민단체들은 일제히 정부가 무책임한 맹탕 안을 내놨다고 비판했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은 한겨레에 “비판받았던 문재인 정부도 4개 안을 냈는데, 어느 때보다 연금 개혁이 절박하고 대통령과 정치권에서 (연금 개혁을) 강조해온 상황에서 정부가 맹탕 안을 낸 건 무책임하다”며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해야 할 정부가 그 역할을 하지 않아 뒷 과정도 맹탕으로 만들어버렸다”고 짚었다.
김원섭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한국연금학회 회장)도 “복지부 안에는 개혁안이 없다”며 “공론화도 기본적으로 내용을 던지고 찬성과 반대를 물어야 하는데, 지금은 내용도 없이 국회에 공을 떠넘긴 것”이라고 말했다. 300여개 노동·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은 이날 논평을 내어 “3대 개혁으로 연금 개혁을 제시했는데도 구체적 수치를 제시하지 않으며 연금 개혁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며 원점 재검토를 촉구했다.
야당도 매서운 비판에 나섰다.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의원(국회 연금개혁특위 야당 간사)은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청년과 미래를 위해 연금 개혁을 하겠다고 했지만, (모수 개혁이 빠진) 이건 안 하겠다고 한 것과 같다”고 짚었다. 대통령실은 “이날 발표는 끝이 아닌 개혁의 출발점”이라며 “앞으로 공론화 과정을 통해 대안의 범위를 좁혀나가고, 미래를 위한 국민의 결단을 착실하게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임재희 기자
limj@hani.co.kr 김윤주 기자
kyj@hani.co.kr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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