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성 교사의 인문 사회 비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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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것은, 생물적·동물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신을 타인과 구별되는 존재로 파악하고, 자기 자신을 자신이 속한 가정, 사회, 국가의 한 구성원으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구성원에게 부여되는 사회적·도덕적 책임을 수용하여, 자신의 존재 가치와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뜻한다.―<도덕>(교육인적자원부) 38쪽
자아 발견이란, 단순히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어떤 조건에 처해 있고, 어떤 가능성과 이상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대하여 올바로 아는 것이다. 또 자신의 삶을 의미 있고 보람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즉, 타인이 나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윤리와 사상>(교육인적자원부) 31쪽
논제 찾아 생각하기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지능이 발달하게 되면 자기보다는 자기 주변에 먼저 눈길을 돌리게 되지. “엄마, 내가 대체 누구예요?”라고 묻는 아이 봤어? 대신에 아이는 “엄마, 저게 뭐예요?”라며 이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묻지. 그러다가 청소년기에 이르면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이 비로소 생겨. 이처럼 사람은, 먼저 자기 외부 세계를 알려고 하고, 그 다음 자기 내면 세계인 자아의 존재에 눈뜨게 되면서 점차 성숙한 인격으로 성장하게 돼.
최근에 우리 사회도 이제야 청소년기에 접어든 듯해. ‘나’를 알자는 사회 분위기가 이를 말해 주고 있어. 이런저런 종교에서 여는 ‘마음 공부’와 ‘피정(避靜)’, ‘영성 수련’에 사람들이 모이고, 명상을 통해 정신을 수양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 이러한 현상은 물질 만능 시대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어. 정말이지 20세기는 ‘외부 세계’에 집착해 우리의 욕망을 좀더 빨리, 좀더 많이 쌓아올리려고 발버둥쳤어. 그런데 이러한 물질 만능주의가 우리 삶의 터전을 흔들어 놓고 급기야 우리의 인간성마저 무너뜨리려 하자, 근대화에 대한 근본적 회의가 일어난 거야. 탈근대(脫近代)를 향한 여러 가지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이 때문이지.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진정한 ‘나’를 알자는 움직임이야.
서양철학사에서 자아를 최초로 문제삼은 사람은 소크라테스지. 그가 했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 알지?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테두리 안에서만 세상을 인식해. 이때, 나의 지식이 반드시 참인 것은 아니야. 거짓일 수도 있어. 소크라테스는 기존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나와 그런 지식의 참과 거짓을 끊임없이 검토하는 반성적인 나를 구별하여, ‘반성적인 자아’를 진정한 나라고 했어. 자아를 정신적인 존재로 본 거야. 하지만 우리는 고상한 ‘정신’만 소유한 존재가 아니야. 우리는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육체’를 가진 존재이기도 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이러한 측면을 생각해 ‘자아’를 육체와 정신의 양면이 합쳐진 것으로 보았어. 그래서 그는 육체의 움직임에 의한 감각이나 경험한 내용이 정신의 지적인 반응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때 진정한 자아를 알 수 있다고 했지. 자아를 구명(究明)할 때, 정신적인 측면만 강조해 그것만 자아로 보느냐, 아니면 육체와 정신의 합일체로 자아를 보느냐는 지금까지도 끊임없는 논쟁거리야. 그런데 중세에 접어들면서,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자기 존재를 신에게 의존하게 돼. 이 때, 자아는 신과의 관계에서만 파악될 뿐 ‘자기다움’을 드러내지 못했어. 신에게 지배당한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인간 자아의 회복이 이뤄지는데, 그 맨 앞에 서 있는 이가 데카르트야.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중세적 사고에 반기를 든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통해 생각하는 인간의 주체 의지를 강조함으로써, 신의 권력에 의해 존재 의미가 부여된 중세의 세계관을 벗어날 수 있었지. 이를 위해 데카르트가 행한 방법은 회의(懷疑)였어.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했어. 그는 권위자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관습적 지식도 믿을 수가 없었고, 경험적 지식 또한 환상, 착각, 꿈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의심했으며, 수학적 지식까지도 사람들이 실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의심했지. 그러나 모든 것을 의심해도, 의심하고 있는 ‘나’만은 의심할 수 없었어.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의식 활동자로서 ‘나’를 발견한 거야. 그에게 ‘나’는 바로 이성적 사유였어. ‘반성적 사유를 통한 자아 찾기’라는 소크라테스의 전통은 ‘이성적 사유를 통한 자아 찾기’라는 데카르트의 근대적 자아 찾기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지. 여기에서 우리는 새로운 ‘자아’를 모색하며 진정한 ‘주체’를 형성하려는 레비나스의 말을 들으며 결론 아닌 결론을 맺어야 할 것 같아. 이제까지 서양 철학은 모든 것을 ‘자아’의 영역으로 환원시켜 버렸어. 나와 다른 것은 나의 필요에 의해 나에게서 배제되거나 나의 틀 속에 포섭됐지. 그리하여 사람조차도 ‘나’의 필요에 따라 분류되는 사물과 다를 바가 없게 되었지. 이러한 흐름에 대한 반성에서 그는 ‘타자의 사유’를 내놓았어. 나의 시각에서 벗어나, 남의 시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자는 거야.
하지만 인간의 주체성을 타인과의 윤리적 관계를 통해서 찾고자 하는 그의 견해는, 나의 나 됨을 타인의 존재에 종속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론에 부닥치게 되지. 그러나 ‘관계’라는 개념 자체가 벌써 어느 하나로 종속되거나 귀속될 수 없는 두 항의 분리를 전제로 해. 그러므로 나의 나됨, 즉 나의 ‘자기성’의 성립 없이는 윤리적 관계가 가능하지 않아. 홀로 된 단독자이면서, 동시에 타자와 함께 하는 ‘나’를 깨달을 때 ‘나’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레비나스의 말은 이래서 더욱 의미를 갖지. <교과서와 함께 구술·논술 뛰어넘기> 저자, 여수여고 교사
서양철학사에서 자아를 최초로 문제삼은 사람은 소크라테스지. 그가 했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 알지?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테두리 안에서만 세상을 인식해. 이때, 나의 지식이 반드시 참인 것은 아니야. 거짓일 수도 있어. 소크라테스는 기존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나와 그런 지식의 참과 거짓을 끊임없이 검토하는 반성적인 나를 구별하여, ‘반성적인 자아’를 진정한 나라고 했어. 자아를 정신적인 존재로 본 거야. 하지만 우리는 고상한 ‘정신’만 소유한 존재가 아니야. 우리는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육체’를 가진 존재이기도 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이러한 측면을 생각해 ‘자아’를 육체와 정신의 양면이 합쳐진 것으로 보았어. 그래서 그는 육체의 움직임에 의한 감각이나 경험한 내용이 정신의 지적인 반응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때 진정한 자아를 알 수 있다고 했지. 자아를 구명(究明)할 때, 정신적인 측면만 강조해 그것만 자아로 보느냐, 아니면 육체와 정신의 합일체로 자아를 보느냐는 지금까지도 끊임없는 논쟁거리야. 그런데 중세에 접어들면서,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자기 존재를 신에게 의존하게 돼. 이 때, 자아는 신과의 관계에서만 파악될 뿐 ‘자기다움’을 드러내지 못했어. 신에게 지배당한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인간 자아의 회복이 이뤄지는데, 그 맨 앞에 서 있는 이가 데카르트야.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중세적 사고에 반기를 든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통해 생각하는 인간의 주체 의지를 강조함으로써, 신의 권력에 의해 존재 의미가 부여된 중세의 세계관을 벗어날 수 있었지. 이를 위해 데카르트가 행한 방법은 회의(懷疑)였어.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했어. 그는 권위자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관습적 지식도 믿을 수가 없었고, 경험적 지식 또한 환상, 착각, 꿈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의심했으며, 수학적 지식까지도 사람들이 실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의심했지. 그러나 모든 것을 의심해도, 의심하고 있는 ‘나’만은 의심할 수 없었어.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의식 활동자로서 ‘나’를 발견한 거야. 그에게 ‘나’는 바로 이성적 사유였어. ‘반성적 사유를 통한 자아 찾기’라는 소크라테스의 전통은 ‘이성적 사유를 통한 자아 찾기’라는 데카르트의 근대적 자아 찾기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지. 여기에서 우리는 새로운 ‘자아’를 모색하며 진정한 ‘주체’를 형성하려는 레비나스의 말을 들으며 결론 아닌 결론을 맺어야 할 것 같아. 이제까지 서양 철학은 모든 것을 ‘자아’의 영역으로 환원시켜 버렸어. 나와 다른 것은 나의 필요에 의해 나에게서 배제되거나 나의 틀 속에 포섭됐지. 그리하여 사람조차도 ‘나’의 필요에 따라 분류되는 사물과 다를 바가 없게 되었지. 이러한 흐름에 대한 반성에서 그는 ‘타자의 사유’를 내놓았어. 나의 시각에서 벗어나, 남의 시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자는 거야.
박용성 여수여고 교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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