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숙의 학부모코칭
고현숙의 학부모코칭 / 유명인사를 만나면 나는 아이들 갖다 주려고 사인을 청하여 받는 편이다. 환경재단 최열 대표, 산악인 엄홍길 대장, 디자이너 이상봉씨, 개그맨 김제동씨, 축구선수 나카타 등등. 이분들은 흔쾌히 좋은 글귀를 담아 아이들 앞으로 사인을 해주었고, 집에 가져와 보여주면 아이들도 좋아했다. 며칠 전에는 책을 낸 지인이 자기 책에 사인을 해서 아이들에게 전해주라고 했다. 그런데 “연수&승수에게”로 시작되는 사인을 보더니, 둘째 승수가 나에게 물었다. “엄마, 왜 제 이름은 꼭 형 뒤에 써줘요?” 엥? “그야 당연히, 네가 동생이니까 그렇지”라고 대답은 반사적으로 나오는데, 뒤로 갈수록 내 목소리에 힘이 없어졌다. 하긴, 왜 형 이름을 만날 앞에 써야만 되느냐? 열 번 중에 한두 번은 자기 이름도 앞에 올 수 있지 않으냐, 둘째로서는 제기할 수 있는 항변이 아닌가? 형제간 서열은 운명이라는 말이 있다. 심리학자 아들러(Adler)는 출생순서에 따른 성격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부모의 사랑을 놓고 다투는 형제간 경쟁은 아기 때부터 시작되고, 무력하게 태어나 타인의 사랑과 인정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지난한 과정에서 자기 포지션에 맞는 나름의 전략과 기술을 발전시킨다. 그래서 몇째로 태어났느냐가 무의식적으로 성품이나 스타일에 영향을 준다. 다양성 전문 코치인 수 월든(Sue Walden)을 지난달에 만났다. 그에 의하면 맏이들은 어려서부터 책임감을 훈련받는다고 한다. 그 결과 나보다 전체를 앞세우고 리더십을 키우게 되는 한편, 타인에게 상사 노릇을 하려 드는 지시형 어른이 되기 쉬우며, 안 좋은 경우 독재적인 경향을 띨 수 있다고 한다. 중간 아이들은 맏이와 막내 양쪽 세계를 다 보고 이해하면서 자라기 때문에, 조정이나 화해를 주선하는 구실을 잘한다. 또한 이들은 남의 주의를 끄는 방법에 관한 한 천재들이다. 가만 있으면 아무도 주목해주지 않는 포지션의 생존전략이라고 할까. 열심히 공부하거나, 말썽을 피우거나, 완벽하게 착한 척하거나, 아무튼 남보다 튀는 전략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 보인다. 막내는 가족의 전체 시스템을 잘 파악한다. 누가 권력이 있고, 어떤 일을 누가 주관하는지, 누구에게 잘 보여야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지에 예민하다. 그래서 가족뿐만 아니라 어느 조직, 사회에 대해 시스템적인 관점을 갖게 되며, 종종 그 시스템을 자기를 위해 활용하는 영리한 면이 발달한다고 한다. 한마디로 눈치가 빠르다는 뜻이 되겠다.
요즘은 형제 경영이라 하여, 재벌 사업체를 형제가 나눠 맡아 경영하는 경우도 종종 눈에 띈다. 모기업의 뿌리를 공유하고 그룹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역시 기업의 세계에서도 각자의 독립성을 추구하는 면이 보인다. 그룹 차원의 공통 문화에 대한 비중보다 자기 기업만의 색깔을 찾고자 하는 면도 역시 맏이가 아닌 동생들의 성향인듯하다. 재미있는 관찰이다. 우리 자신도 누군가의 형 또는 동생이면서, 이제 부모가 되어 서로 형·아우인 아이들을 지켜본다. 서열이 아이들에게 주는 영향은 매우 크지만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뤄진다. 생존 목적과 관습이 그들을 학습시키기 때문이다. 외둥이의 가장, 그리고 거의 유일하게 좋은 점은 형제간 치열한 경쟁에서 오는 인성 왜곡이 없는 것이라 할 정도로. 나도 다음에는 둘째의 이름을 앞에 넣고 사인을 받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둘째가 나름 정의파, 평등파인 데는 다 이유가 있는지도 모른다. 관행이라는 이름의 의미 없는 반복을 가끔은 뒤집어 주는 묘미도 있고, 그 기회에 이 평등파의 욕구도 충족시켜주고 말이다. 고현숙 한국코칭센터 사장 Helen@ekl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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