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
[난이도 수준-고2~고3] 49. 기계의 일과 인간의 일, 감정노동의 딜레마
50. 인간의 조건 - 악이 우리의 운명이 되지 않으려면(마지막회) 인간은 돈 앞에 평등하다. 피부색이 어떻건, 어느 지역에서 왔건, 돈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빵을 사는 사람들은 밀을 기른 사람이 공산주의자인지, 공화주의자인지, 입헌주의자인지 파시스트인지, 흑인인지, 백인인지 알지 못한다.”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말이다. 돈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는 이 점에서 매력적이다. 부자 앞에서는 ‘왕후장상의 씨’도 별 소용이 없다. 아득바득 돈을 많이 벌면 누구라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력하면 누구라도 가장 윗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다. 돈 벌기가 ‘전 국민의 스포츠’처럼 되어버린 이유다. 그러나 돈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다. 돈은 항상 ‘무엇을 위해서’ 필요할 뿐이다. 내 집 마련을 위한 적금은 가슴을 뿌듯하게 한다. 가족을 먹여 살리려 돈벌이하는 가장에게 목돈은 확실한 피로회복제가 될 테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돈이 있다면 어떨까? 사실, 보통 사람들에게 100억원과 1000억원은 차이가 없다. 어차피 평생 써도 못 쓸 만큼 큰돈이라는 점에서는 똑같기 때문이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돈은 낭비할 곳을 찾게 만든다. 쓸 만한 구두에서 좋은 구두를, 나아가 명품 구두를 원하게 하는 식이다. 하지만 최고의 상품을 손에 넣으면 행복해질까? 필요를 넘어선 소비는 마음만 헛헛하게 할 뿐이다. 갑부가 우울증에 빠지고 심지어 목숨을 끊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이유다.
돈은 우리 삶을 망가뜨리기도 한다. 예전에 사람들은 이웃들과 함께 놀면서 자랐다. 집 근처 일터에서 이웃끼리 평생 함께 일했다. 결혼식 같은 큰일도 품을 나누며 치러 냈고, 장례식 때도 이웃과 가족은 일손을 나누며 정을 키웠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우리는 ‘돈을 치르고’ 병원에서 태어난다. ‘돈을 치르고’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친구를 사귀며, ‘돈을 벌기 위해’ 각각 다른 직장을 찾는다. ‘돈을 치르고’ 결혼식장을 빌려 식을 치른다. 살가운 정은 함께하는 일과 시간이 많을 때 생겨나는 법이다. 우리 생활에서 품앗이는 사라지고 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부조금’을 서로 주고받을 뿐이다. 돈만 오가는 우리의 인간관계에서는 정이 쌓일 만한 틈이 별로 없다. 인간관계는 서로에게 지우고 갚아야 하는 빚처럼 되어버렸다. 그런데도 우리는 “행복해지려면 얼마나 돈이 필요할까?”를 묻지 않는다. 끊임없이 ‘더 많은 돈’을 외치기만 할 뿐이다. 외롭고 성격 고약한 스크루지 영감을 부러워할 사람이 있을까? 돈만 바라보며 달리다 보면 스크루지 영감은 어느덧 나의 미래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옛사람들이 돈을 천하게 여긴 까닭이 가슴에 다가올 테다. 선비들은 ‘돈’이라는 낱말을 입에 올리지조차 않았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다. 옛 그리스 사람들에게 돈은 자유인이 탐낼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다운 삶은 생계를 위한 일에는 없었다. 자유인에게는 마땅히 여유(schole·스콜레)가 있어야 한다. 먹고사는 일에서 벗어나, 정말 ‘인간다운 일’을 하고 있을 때에야 제대로 된 삶이 열릴 터였다. ‘인간다운 일’이란 무엇일까?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정치’라고 잘라 말한다. 옛 그리스인에게 정치는 살림살이를 나아지게 하려고 궁리하는 작업이 아니었다. 우리 선비들도 명예와 자존심에 목숨 걸지 않았던가. 돈벌이는 인간다운 삶을 꾸려나갈 정도에서 그쳐야 한다. 그다음에는 인간에게 어울리는 일을 하는 데 매달려야 할 테다. 충분히 재산을 모았는데도 돈에 정신 팔고 있다면, 노예의 삶과 다를 게 뭐 있겠는가. 옛 그리스인의 눈으로 볼 때 현대인은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돈을 버는 일에 매달릴 뿐, 어떻게 여유를 누리고 인간다운 삶을 꾸릴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우리의 학교도 마찬가지다. 영어, 수학 등 직업을 갖는 데 필요한 수업에는 열심이지만 음악, 미술, 체육 등 삶을 풍요롭게 누리는 기술을 가르치는 과목은 늘 찬밥이다. 한나 아렌트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노동이 사라진 노동자의 사회’라고 말한다. 일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일이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실업은 단순히 생활이 곤란해지는 문제에서 그치지 않는다. 일자리는 이제 한 사람의 자존심처럼 되었다. 사람들은 자기의 가치를 자신의 노동에서 찾곤 한다. 이런 세상에서 노동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찾아든 여유는 고통일 뿐이다. 노예란 삶의 목적을 스스로 찾지 못하는 이들이다. 이런 잣대로 보면 우리 중에 노예가 아닌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을 듯싶다. 삶이 헛헛한 사람들은 기댈 만한 것을 찾아 헤맨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질 무렵, 유럽의 젊은이들은 전쟁 소식에 환호성을 질렀다. 전쟁은 그들에게 ‘삶의 목적’을 던져줄 모험이었다. 평범한 소시민도 전쟁터에서는 영웅이 되곤 한다. 이때 나의 삶은 일상의 비루함에서 벗어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몸 바치는 숭고한 인물로 여겨질 테다. 삶의 목적을 스스로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독재자도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너는,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독재자들의 모습에 외로웠던 가슴은 뭉클해진다. 이렇게 내 삶은 남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송두리째 넘어가 버린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인생의 가장 큰 죄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라디오, 텔레비전에서 인터넷, 스마트폰, 트위터에 이르기까지 세상에는 내 시간과 마음을 채워줄 것들로 넘쳐난다. 노예에게는 노동 없는 시간이 무섭다. 세상에는 그 두려움을 없애주기 위한 중독거리들로 가득하다. 과연 우리는 노예보다 얼마나 나은 삶을 살고 있을까?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timas@joongdong.org
※ 그동안 <인문학 올드 앤 뉴>를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다음주부터는 <시사 쟁점! 이 한권의 책>으로 새롭게 찾아뵙겠습니다.
[난이도 수준-고2~고3] 49. 기계의 일과 인간의 일, 감정노동의 딜레마
50. 인간의 조건 - 악이 우리의 운명이 되지 않으려면(마지막회) 인간은 돈 앞에 평등하다. 피부색이 어떻건, 어느 지역에서 왔건, 돈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빵을 사는 사람들은 밀을 기른 사람이 공산주의자인지, 공화주의자인지, 입헌주의자인지 파시스트인지, 흑인인지, 백인인지 알지 못한다.”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말이다. 돈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는 이 점에서 매력적이다. 부자 앞에서는 ‘왕후장상의 씨’도 별 소용이 없다. 아득바득 돈을 많이 벌면 누구라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력하면 누구라도 가장 윗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다. 돈 벌기가 ‘전 국민의 스포츠’처럼 되어버린 이유다. 그러나 돈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다. 돈은 항상 ‘무엇을 위해서’ 필요할 뿐이다. 내 집 마련을 위한 적금은 가슴을 뿌듯하게 한다. 가족을 먹여 살리려 돈벌이하는 가장에게 목돈은 확실한 피로회복제가 될 테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돈이 있다면 어떨까? 사실, 보통 사람들에게 100억원과 1000억원은 차이가 없다. 어차피 평생 써도 못 쓸 만큼 큰돈이라는 점에서는 똑같기 때문이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돈은 낭비할 곳을 찾게 만든다. 쓸 만한 구두에서 좋은 구두를, 나아가 명품 구두를 원하게 하는 식이다. 하지만 최고의 상품을 손에 넣으면 행복해질까? 필요를 넘어선 소비는 마음만 헛헛하게 할 뿐이다. 갑부가 우울증에 빠지고 심지어 목숨을 끊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이유다.
돈은 우리 삶을 망가뜨리기도 한다. 예전에 사람들은 이웃들과 함께 놀면서 자랐다. 집 근처 일터에서 이웃끼리 평생 함께 일했다. 결혼식 같은 큰일도 품을 나누며 치러 냈고, 장례식 때도 이웃과 가족은 일손을 나누며 정을 키웠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우리는 ‘돈을 치르고’ 병원에서 태어난다. ‘돈을 치르고’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친구를 사귀며, ‘돈을 벌기 위해’ 각각 다른 직장을 찾는다. ‘돈을 치르고’ 결혼식장을 빌려 식을 치른다. 살가운 정은 함께하는 일과 시간이 많을 때 생겨나는 법이다. 우리 생활에서 품앗이는 사라지고 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부조금’을 서로 주고받을 뿐이다. 돈만 오가는 우리의 인간관계에서는 정이 쌓일 만한 틈이 별로 없다. 인간관계는 서로에게 지우고 갚아야 하는 빚처럼 되어버렸다. 그런데도 우리는 “행복해지려면 얼마나 돈이 필요할까?”를 묻지 않는다. 끊임없이 ‘더 많은 돈’을 외치기만 할 뿐이다. 외롭고 성격 고약한 스크루지 영감을 부러워할 사람이 있을까? 돈만 바라보며 달리다 보면 스크루지 영감은 어느덧 나의 미래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옛사람들이 돈을 천하게 여긴 까닭이 가슴에 다가올 테다. 선비들은 ‘돈’이라는 낱말을 입에 올리지조차 않았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다. 옛 그리스 사람들에게 돈은 자유인이 탐낼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다운 삶은 생계를 위한 일에는 없었다. 자유인에게는 마땅히 여유(schole·스콜레)가 있어야 한다. 먹고사는 일에서 벗어나, 정말 ‘인간다운 일’을 하고 있을 때에야 제대로 된 삶이 열릴 터였다. ‘인간다운 일’이란 무엇일까?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정치’라고 잘라 말한다. 옛 그리스인에게 정치는 살림살이를 나아지게 하려고 궁리하는 작업이 아니었다. 우리 선비들도 명예와 자존심에 목숨 걸지 않았던가. 돈벌이는 인간다운 삶을 꾸려나갈 정도에서 그쳐야 한다. 그다음에는 인간에게 어울리는 일을 하는 데 매달려야 할 테다. 충분히 재산을 모았는데도 돈에 정신 팔고 있다면, 노예의 삶과 다를 게 뭐 있겠는가. 옛 그리스인의 눈으로 볼 때 현대인은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돈을 버는 일에 매달릴 뿐, 어떻게 여유를 누리고 인간다운 삶을 꾸릴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우리의 학교도 마찬가지다. 영어, 수학 등 직업을 갖는 데 필요한 수업에는 열심이지만 음악, 미술, 체육 등 삶을 풍요롭게 누리는 기술을 가르치는 과목은 늘 찬밥이다. 한나 아렌트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노동이 사라진 노동자의 사회’라고 말한다. 일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일이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실업은 단순히 생활이 곤란해지는 문제에서 그치지 않는다. 일자리는 이제 한 사람의 자존심처럼 되었다. 사람들은 자기의 가치를 자신의 노동에서 찾곤 한다. 이런 세상에서 노동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찾아든 여유는 고통일 뿐이다. 노예란 삶의 목적을 스스로 찾지 못하는 이들이다. 이런 잣대로 보면 우리 중에 노예가 아닌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을 듯싶다. 삶이 헛헛한 사람들은 기댈 만한 것을 찾아 헤맨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질 무렵, 유럽의 젊은이들은 전쟁 소식에 환호성을 질렀다. 전쟁은 그들에게 ‘삶의 목적’을 던져줄 모험이었다. 평범한 소시민도 전쟁터에서는 영웅이 되곤 한다. 이때 나의 삶은 일상의 비루함에서 벗어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몸 바치는 숭고한 인물로 여겨질 테다. 삶의 목적을 스스로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독재자도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너는,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독재자들의 모습에 외로웠던 가슴은 뭉클해진다. 이렇게 내 삶은 남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송두리째 넘어가 버린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인생의 가장 큰 죄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라디오, 텔레비전에서 인터넷, 스마트폰, 트위터에 이르기까지 세상에는 내 시간과 마음을 채워줄 것들로 넘쳐난다. 노예에게는 노동 없는 시간이 무섭다. 세상에는 그 두려움을 없애주기 위한 중독거리들로 가득하다. 과연 우리는 노예보다 얼마나 나은 삶을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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