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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감정노동’

등록 2010-08-29 16:02수정 2010-08-29 16:29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
[난이도 수준-고2~고3]

48. 절약은 왜 ‘경제의 적’이 되었을까 - 쇼핑 중독에서 벗어나려면
49. 기계의 일과 인간의 일, 감정노동의 딜레마
50. 인간의 조건 - 악(惡)이 우리의 운명이 되지 않도록 이겨내려면

<논어, 꿈을 논하다> 김정빈 글, 김덕호 그림 주니어 김영사
<감정노동> 앨리 러셀 흑실드 지음, 이가람 옮김이매진

손님은 정말 ‘진상’이었다. 다짜고짜 반말에, 아무리 설명을 해도 제멋대로 하겠단다. 그러나 손님에게 화를 낼 수도 없다. 끝까지 얼굴의 미소를 놓아서는 안 된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피가 솟구친다. 이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할까?

미국의 어느 항공사에서는 직원들에게 몇 가지 ‘대처요령’을 일러 주곤 한다. 막무가내로 생떼를 쓰는 손님이라면, 아예 “저 사람은 어린아이다”라고 여겨 버려라. 어린아이는 한없이 억지를 부린다. 그래도 주먹을 내지르기보다는 어르고 달래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다. 어리고 약하니 보호해야 되지 않겠는가. “저 손님에게 뭔가 좋은 일이 있었나 보다”라는 식으로 상대의 처지를 헤아려 보아도 좋겠다.

그래도 ‘진상짓’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때는 이 상황에도 어차피 끝이 있다는 희망을 되새김질해야 한다. “퇴근까지 한시간 남았다”, “삼십분 뒤면 집에 갈 수 있어” 등등.


상황을 한발 떨어져 바라보는 태도도 중요하다. 손님은 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마뜩잖은 우리 회사의 일처리에 대해 뭐라 하고 싶은 거다. 회사에 쏟아지는 불만을 ‘내 문제’로 여겨서 상처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니 친절하게 웃고 또 웃어주어야 한다.

〈논어, 꿈을 논하다〉, 〈감정노동〉
〈논어, 꿈을 논하다〉, 〈감정노동〉

현대인들에게 감정노동(emotional work)은 일의 큰 부분이다. 친절하고 나긋한 태도가 중요한 ‘경쟁력’으로 여겨지는 시대다. 감정노동이란 가장 바람직한 표정을 짓기 위한 노력을 말한다. 인상 찌푸리고 톡 쏘아붙이는 직원을 좋아할 고객은 없다. 하지만 하루 종일 헤실헤실 웃고 있기가 어디 쉬운가. 그래서 스트레스는 쌓여만 간다.

옛날에도 감정관리는 아주 중요했다. 어느 사회에나 따라야 할 감정법칙(feeling rule)이 있다. 예컨대, 장례식에서는 슬픈 표정을 지어야 한다. 멋모르고 싱긋 웃었다가는 온갖 비난을 받게 될 테다. 생일 때는 절대 인상 찌푸리고 있어서는 안 된다. 축하해주는 가족들 기분도 헤아려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현대인에게는 감정관리가 심각한 ‘노동’이 되어버렸다. 우리에게는 짊어져야 할 역할이 너무 많다. 수백년 전 사람들은 한가지 역할로만 평생을 살았다. 서양에서는 이름부터가 자기 직업과 똑같았다. 빵 굽는 사람이면 ‘베이커’(baker), 옷을 만들면 ‘슈나이더’(Schneider), 농부면 ‘바우어’(Bauer)라 하는 식이다. (지금도 이 직업들은 사람들의 이름으로 굳어져 있다.) 사람들은 나를 꼭 직업만큼의 사람으로만 대했다. 게다가 평생 얼굴 맞대며 지내는 이들은 가족과 동네 주민이 고작이었다.

반면, 현대인들은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예컨대, 가족 안에서는 막내였던 사람이, 직장에서는 맏이 역을 한다. ‘부장님’으로 지시를 내리고 부하 직원을 챙기는 식이다. 동호회 모임에서는 회원으로서 자유롭고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단골가게에 가서는 꼼꼼하고 세심한 고객으로서 또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할 테다. 하루에도 자신의 역할은 몇 가지씩 바뀌곤 한다.

이때마다 감정노동은 영혼을 갉아먹는다. 상황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감정을 표현해 내야 한다. 잘나가는 사람들일수록 감정노동은 더욱 어려워진다. 주어지는 역할이 더욱 많은 까닭이다.

따라서 잘사는 집안일수록, 가정에서부터 감정을 다스리는 기술을 가르치곤 한다. 할아버지에게 뽀뽀하기 싫어하는 손녀가 있다 해보자. 못사는 집에서는 부모가 이렇게 다그치기 쉽다. “어린애들은 할아버지께 뽀뽀하는 거야.” 그러나 감정노동에 신경 쓰는 집에서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내가 할아버지께 뽀뽀하고 싶지 않다는 건 알아. 그렇지만 할아버지는 몸이 편찮으시잖아. 게다가 너를 아주 좋아하신단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적절한 감정을 ‘느끼도록’ 어릴 때부터 길들여지는 셈이다.

감정노동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인격자란 남을 헤아려서 자기 마음을 잘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다. 공자도 ‘자기를 이기고 예를 따르는 자세’(극기복례:克己復禮)가 중요하다고 했다. “남을 이기기를 좋아하지 않고 자기를 자랑하지 않으며, 남을 원망하지 않고 헛된 욕심을 내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는 끝없이 노력해야 할 테다.

현대인에게 쏟아지는 감정노동도 공자의 가르침과 비슷하지 않을까? 직장에서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으며’, ‘자기보다 남을 헤아리고’, 언제나 친절한 낯빛과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해야 한다. 늘 이런 태도를 보이는 직원은 인격적으로 잘 가다듬어진 사람 아닐까?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직장 생활은 나의 마음을 닦는 과정인 셈이다.

안타깝게도, 직장을 인격을 다잡는 곳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듯싶다. 오히려 많은 이들은 직장 스트레스로 인격이 망가지고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온종일 친절한 미소를 머금고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 직원이 과연 진짜 ‘나’일 수 있을까? 일이 끝나면 나는 직원에서 ‘나’로 돌아올 테다. 친절하려는 노력은 내가 직장에서 쓸 ‘가면’에게 돌아갈 테다. 진짜 ‘나’는 늘어나는 마음의 상처로 신음하게 될 뿐이다.

반면, 공자가 말한 마음 다스림은 자기 자신을 닦는 길이었다. 군자(君子)는 의롭지 않을 때는 화도 낼 줄 알아야 한다. 감정노동은 그렇지 않다. 간과 쓸개를 내주고서라도 남의 비위를 맞추라고 다그칠 뿐이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거리에는 온통 친절한 직원들 천지다. 환한 미소는 어디에서나 피어난다. 그럼에도 마음의 병은 늘어만 간다. 심리 상담에 대한 책들이 19세기에 예절을 다루던 서적만큼이나 많아진 요즘이다. 자기 감정도 ‘내 것’일 수 없는 세상, 우리는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 거리에 가득한 미소가 우울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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