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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네 글에 간판을 달아봐

등록 2010-10-11 09:36

고경태의 초·중딩 글쓰기 홈스쿨
고경태의 초·중딩 글쓰기 홈스쿨
[함께하는 교육] 우리말 논술

고경태의 초·중딩 글쓰기 홈스쿨 24
[난이도 수준-중2~고1]

“누구냐 넌.”

<올드보이>를 떠올리다 피식 웃었다. 낮고 음산한 목소리로 묻는 극중의 오대수(최민식 분). 한데 전화를 받는 ‘영 걸’의 반응이 딴판이라면…. “저는 2000년 8월에 태어났고요. 진세유치원을 거쳐 문촌초등학교 4학년이에요. 달걀형 얼굴에 눈은 작고 보조개가 있는데 키는 145센티미터 정도입니다.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말이 안 된다. 이건 어떤가. “저는요. 김 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치치카포 사리사리 센타 워리워리 쎄뿌리깡 무두셀라 구르미 하리케인에 담벼락 서생원에 고양이 바둑이는 돌돌이, 라고 하는데요.”

사람에겐 이름이 있다. 짧은 이름이 있다. 개인적으로 여러 이름들을 지어봤다. 그중 준석과 은서라는 아이들 이름은 빼야 한다. 가족이 흔쾌히 동의할 만한 이름을 내놓지 못해, 다른 이의 힘을 빌렸다. 세월이 흘렀다. 이젠 중딩과 초딩이 된 그 아이들에게 이름 짓는 고통을 안겨준다. 오픈게임으로 조사부터 시켰다. 사람이 아닌 상점의 이름. 바로 ‘간판’이다.

준석과 은서는 약 두 시간 동안 집 근처의 거리를 헤매며 간판들을 취재했다. 그다음엔 ‘우리 동네 간판’을 주제로 글을 썼다. 은서의 글이다. “재미있는 간판이 많다. 그 경우 10개를 보여주겠다.(중략) 아나파 치과는 치료가 안 아파요, 를 말하는 것 같다. 꿀벌미시클럽은 프라자 근처에 있는데 꼭 꿀벌들이 다니는 미시클럽 같다. 아마도 꿀벌들처럼 달콤한 여자/남자가 다니는 클럽일 것이다. 위풍닭닭은 ㅋ. 이 상점 이름을 지은 사람은 정말 창의력이 풍부한 사람일 것이다.(하략)” 미시클럽이 뭐 어떻고 어째? 은서는 특이한 이름 10개를 소개한 뒤 설명을 달았다. 준석은 중딩답게 웃기는 간판을 열거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책 제목과 신문 표제어 뽑기의 어려움으로까지 연결해 이야기를 확장시켰다.

본 게임에 들어가 보자. 준석과 은서 각각에게 자신의 글 제목을 뽑아보도록 했다. 글쓰기 홈스쿨을 시작한 이후 가장 낯선 과제다. 은서는 어느 때보다 투덜거렸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거렸다. 은서의 작품만 보겠다. “1. 내가 본 잼있는 간판들 2. 잼있어서 눈길을 끄는 간판들 3. 잼있어서 기억이 나는 간판들 4. 센스만점 간판조사 5. 간판에 대하여 6. 내가 조사한 센~스 있는 간판들 7. 센스 짱 간판들 8. 세련된 간판들 9. 크하하 웃기는 간판들 10. 세련이 너무 넘치는 간판들.” 아빠의 지시에 따라 10개나 뽑았다. 무작정 시비를 걸었다. “죄다 간판이란 말이 들어갔네. 그 말 넣지 말고 다시 10개!”

내가 생각해도 고문이었다. 두 번을 더 ‘빠꾸’시켰다. 은서는 이를 갈며 총 40개의 제목을 지었다. 그 마지막 결과물 10개는 다음과 같다. “1. 이런 재밌는 상점 이름을 들어는 보셨나요? 2. 이렇게 잼있는 상점 이름은 처음 봤어요! 3. 위풍닭닭, 창의력의 차원이 다른 상점 이름 4. 이런 잼있는 상점도 뜻이 있을 거예요 5. 사람들을 오게 하려고 만든 재미있는 상점이름들 6. 뭔가 색다른 상점 이름 7. 이젠 상점이름의 차원이 달라진다 8. 그냥 것들과 다른 상점이름 9. 창의력이 풍부한 상점 이름들 10. 머리속에 쏙쏙 박히는 상점 이름.” 이번엔 ‘간판’ 대신 전부 ‘상점’투성이다.


제목은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가르칠 생각은 없다. 알맹이를 짧은 문장 안에 녹여내는 고통을 박터지게 경험했으면 충분하다. 간판 하나에 기울이는 사람들의 정성과 고생이 와닿았으면 된다. 먼 훗날 준석과 은서가 아들딸 이름을 제 손으로 짓는 데 성공할지 모르겠지만.

<한겨레> 오피니언넷 부문 기자 k21@hani.co.kr

※ 아이들이 쓴 글을 포함한 이 글의 전문은 아하!한겨레(ahahan.co.kr)와 예스24 ‘채널예스’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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