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12일 서울 은평구 충암학원 주변에서 지역 시민단체 및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소속 교사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은평시민신문 제공
급식비를 내지 못한 학생들에게 “내일부터 학교 오지 말라. 너 같은 애들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피해를 본다”와 같은 막말을 한 교감이 있는 학교. 이 말을 두고 학부모들이 항의하자 “아이들이 도덕적 해이로 급식비를 내지 않는다”고 말하는 교장이 있는 학교. 학생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긴 이 학교의 이름은 서울 은평구에 있는 충암고입니다.
충암고는 교육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꽤 익숙한 이름입니다. 사학 비리로 자주 언론에 오르내리는 학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충암고가 속한 충암학원의 사학 비리 역사를 하나씩 톺아보겠습니다.
1. 2011년 서울시 특별감사에서 비리 32건 적발
서울시교육청은 2011년 2월 학교법인 충암학원과 충암 중·고교에 대해 특별감사를 벌였습니다. (
▶관련 기사 : ‘사학비리’ 충암학원 이사진 취임 취소) 곽노현 전 교육감 시절입니다. 교사 채용 선발과정의 공정성에 대한 민원으로 시작한 감사입니다. 이사회 운영과 시설공사, 학교회계 비리 등에 대한 의혹도 제기됐습니다. 14일 동안의 특별감사 결과, 시교육청은 모두 32건의 비리를 적발했습니다.
충암학원은 2009년 학교 건물의 창호공사를 한다며 공사 계약 서류를 허위로 작성해 공사비 8000만원을 시공업체에 지급했습니다. 하지만 공사는 실제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충암고 야구부 훈련을 위해 서울의 한 대학교 운동장을 빌리면서 사용료 800만원을 해당 대학 야구부 감독에게 현금으로 직접 전달했습니다. 공식적인 회계 절차를 밟지 않은 지급이었습니다. 횡령과 배임이 의심되는 대목입니다.
2007년 12월 충암고의 교실 벽면이 습기로 칠이 벗겨져 있다. 파이프도 녹슬어 있고
2008년부터 2010년까지 14명의 정규 교사를 채용하는 과정에서 채용 시험 문제지, 답안지, 평가지 등 평가 자료를 무단 폐기했습니다. 전형 과정이 공정하게 진행됐는지 살펴볼 수 없게 한 것이지요.
무엇보다 심각한 건 족벌체제로 학교를 마음껏 운영했다는 사실입니다. 재단 이사장의 둘째아들이 2007년부터 충암학원 행정실장으로 재직했는데요. 2008년부터 모두 36차례에 걸쳐 153일동안 사적으로 국외여행을 하면서 법정연가일수를 초과했습니다. 하지만 연가보상비와 급여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지급받았습니다. 실제 행정실장 업무는 계약직으로 채용된 직원이 대행했습니다.
충암학원 설립자이자 초대 교장인 고 이인관씨의 묘역에 교사 40~50명을 동원해 참배 행사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이 행사를 3년 동안 진행하며 쓴 1100여만원의 경비를 충암학원 소속 초등학교의 교수학습활동비 예산에서 충당했습니다. 명백한 회계부정이지요.
시교육청은 이런 감사 결과를 받아 안고 충암학원 이사장과 행정실장인 이사장의 둘째아들 등 12명을 고발하고, 이사 8명과 감사 2명 전원에 대해 임원 취임 승인을 취소했습니다. 교직원 6명은 파면, 해임 등 중징계 처분할 것을 재단에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충암학원은 이를 무시했습니다. 중징계는 경고나 주의 처분 등으로 대체됐고, 부당하게 사용된 돈도 제자리에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
▶관련 기사 : 사학비리 백화점 서울 충암학원에 “학급 감축하라”)
2. 성적 우수 소수 학생 특혜 주는 ‘성적 카스트’
2011년에는 인문계열과 자연계열 3학년생 가운데 각각 8명씩 성적 최상위권 학생 16명을 뽑아 ‘성적 우수 특별반’을 만들어 특혜를 주기도 했습니다. 특별반 학생들은 각자 속해 있는 반에서 아침 조회만 참석하고, 수업은 별도 교실에서 따로 받았습니다. 이 학생들을 위한 영어와 수학 전담 교사가 배치됐고, 국어와 사회, 과학 등의 과목은 학생들이 원하는 교사를 골라서 듣도록 했습니다. 당시 교장(충암고는 2012년 9월 교장이 바뀌었습니다)이 나서서 “서울대와 연·고대 입학생을 늘여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150석 정도의 독서실은 성적을 기준으로 이용 자격을 줬습니다. 한 학년에서 50등 안에 드는 학생만 독서실에 들어갈 수 있게 한 겁니다. 좌석도 성적순으로 배정했습니다. 교사가 특별반 학생을 반장으로 무투표 추대하도록 반 학생들에게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대입 수시모집에서 가산점 1점이라도 더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학생들의 성적을 실명과 함께 학교 외벽에 붙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을 노골적으로 차별한 사실상의 ‘성적 카스트’인 겁니다. (
▶관련 기사 : 최상위권 16명 특혜수업…학생에 교사 선택권까지)
바닥도 늘 젖어 있다.(왼쪽) 충암중학교 학생들은 건물 중앙 통로에 전 이사장 사무실이 들어선 뒤로 건물 뒤 쪽문으로 드나들어야 한다.
3. 낙후된 학교... 설립자 아들은 학교 직원을 개인 비서로
충암고는 2007년에도 <한겨레> 기사에 등장한 적이 있습니다. 재단이 시설 투자를 하지 않아 학교 건물이 낙후하면서 건물 일부가 부서지는 사고가 난 겁니다. 반면 비리로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설립자의 아들이자 전직 재단 이사장인 이홍식 전 이사장은 여전히 학원 운영의 전권을 휘두른다는 기사였습니다. (
▶관련 기사 : 충암학원 학생·교사의 ‘고발’…“이런 학교가 또 있을까요?”) 이 기사에서 이 전 이사장은 학교 직원 3명을 개인 비서로 두고 7000만원짜리 외제 승용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그는 한겨레에 “(승용차를) 내 돈으로 샀다. 세금 덜 내고 운전기사를 지원받으려고 학교 이름으로 등록했다”고 말하기도 했지요. 엄연한 편법을 거리낌없이 말한 겁니다.
이 전 이사장은 2000년 5월 충암고 교장에게 조카의 병역 면제를 부탁했다가 제3자 뇌물교부죄로 실형을 살았고, 1999년에는 난방시설 수리비 명목으로 정부로부터 받은 돈 가운데 3억5500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때 실형을 살면서 이사장직을 박탈당했습니다. 1996년에는 충암학원이 학교 땅에 이 전 이사장 개인 명의의 스포츠센터를 짓고 교사들을 앞세워 학부모들에게 350만원짜리 회원권을 강매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4. 족벌체제로 운영되는 대표 사학 충암학원
이런 모든 문제는 충암학원이 족벌사학이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충암학원은 1965년 고 이인관씨가 설립했습니다. 초대 이사장에는 이씨의 부인 정쟁금씨가 취임했고, 설립자 이씨는 교장이 됐습니다. 1970년 설립자 이씨가 사망했고, 1973년에는 아들 이홍식씨가 2대 이사장이자 교장으로 취임합니다. 이홍식 이사장은 앞서 말한 교비 횡령 비리 등으로 실형을 살면서 이사장에서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아내와 딸, 아들 등에게 이사장직을 물려주면서 법에도 없는 명예이사장 또는 학원장이라는 직책으로 실질적인 이사장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2005년 12월13일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서울 명동에서 열린 사립학교법 개정 무효화 촉구 거리집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5. 2007년 개악된 사립학교법이 근본 원인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은 사립학교법입니다. 한국의 사학은 태생적으로 ’봉건사학왕국’입니다. (
▶관련 기사 : 봉건사학왕국으로 회귀하나) 이사장이나 설립자의 친인척들이 법인이사는 물론 총장·교장, 교직원 자리까지 차지하면서 사학을 사유화했습니다. 비리가 발생하기 손쉬운 구조라는 말입니다.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 2005년 노무현 정부와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사립학교법을 개정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한나라당이 장외 촛불시위까지 하면서 보수 기독교 단체 등과 결합해 사립학교법 재개정을 요구했습니다. 이때 한나라당 대표가 바로 박근혜 대통령입니다.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과 타협하고 2007년 사립학교법을 재개정했습니다.
이때 생긴 대표적인 독소조항이 재단이사회에 설립자 친족을 총장이나 교장으로 임명할 수 있게 해서 족벌경영의 길을 터준 법규입니다. 사립학교법 54조의3 ‘임명의 제한’ 3항을 보면, 학교법인 이사장의 배우자나 직계존속 및 직계비속과 그 배우자는 이사정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학교의 장에 임명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개방 이사의 비율도 축소했기 때문에 이사들은 대체로 설립자와 친한 인사들이어서 3분의 2 이상 찬성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그러니 한 해 대부분의 예산을 정부와 시교육청으로부터 교부받는 사립학교임에도 설립자나 소유자가 마음대로 족벌을 동원해 학교 운영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비리는 자연스레 따라옵니다.
충암고 급식비 막말 사태가 이렇게 멀리까지 왔네요. 하지만 우리가 목도하는 문제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뿌리가 있습니다. 근원이라고 하지요. 뿌리를 갈아 엎지 않으면 언제나 문제는 재발할 수 있습니다. 충암고의 문제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교육의 공공성 문제에 관심을 둬야 하는 까닭입니다.
이재훈 기자
n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