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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회사에서 ‘권위의식’은 전생에 두고 온 단어죠

등록 2021-06-26 10:21수정 2021-06-26 10:48

[토요판] 밀레니얼 읽기
(13) 스타트업에서 일한다는 것

20명 거의 MZ 세대인 스타트업
선후배도 출근시간도 없는 회사
“나만 몰랐어?” 없는 열린 정보

재밌는 일 자율적으로 하는 환경
성장 느낀다면 워라밸 무슨 소용
어제보다 오늘 나아진 느낌 중요
서울 마포구 뉴닉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동료와 함께 출근한 반려견 감사에게 간식을 주고 있다. 박승화 <한겨레21> 기자 eyeshoot@hani.co.kr
서울 마포구 뉴닉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동료와 함께 출근한 반려견 감사에게 간식을 주고 있다. 박승화 <한겨레21> 기자 eyeshoot@hani.co.kr

얼마 전 입사 1주년을 맞았다. 시간은 나보다도 마음이 급한지, 달려가다 못해 날아가버리는 것 같다. 편지와 꽃다발을 건네며 대표인 ‘킴’이 말했다. (우리는 말을 놓은 지 꽤 오래됐다.) “안평, 축하해! 내 느낌상으로는 5년 정도 같이 일한 것 같은데 아직 1년밖에 안 된 거야?”

스타트업 안에서의 시간은 바깥과는 다른 속도로 흐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상 밖의 여러 일이 일어나고, 모든 일은 매번 새롭기 때문이다. 많은 것에 익숙해진 어른과 대부분의 것이 새로운 아이가 시간을 다르게 감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정해져 있는 것보다 함께 정해나가야 하는 것이 많은 이 세계에서, 시간의 밀도는 높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자주 묻는다. 거의 모든 구성원이 엠제트(MZ) 세대로 이루어진 20명 이내의 작은 조직이 어떤 모양새로 돌아가고 있는지를.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게 어때?” “이전에 다니던 회사랑은 많이 달라?” 그럴 때마다 나는 대답한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달라요.” 적어도 내가 속한 스타트업은 그렇다. 이곳엔 선배도, 후배도, ‘꼰대’도, ‘어른’도, 정해진 출근시간도 없다.

출근시간 따로 없고 응답은 이모지로

나의 아침은 알람 없이 시작된다. 창문을 넘어 들어온 햇볕이 존재감을 드러낼 무렵 눈을 뜬다. 오전 10시. 자고 싶은 만큼 자고 나면 몸은 자연스럽게 침대라는 궤도를 이탈해, 하루를 준비하는 모드로 전환된다. 친구들은 묻는다. 스타트업에 다니면 뭐가 제일 좋냐고. 그런 질문엔 별 망설임 없이 대답하게 된다. “가장 좋은 컨디션으로 아침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자율 출퇴근제’가 제일 좋아! 최고야!” 아침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삶의 질이 달라졌다. 지각할까 봐 택시를 타거나,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는 일도 없다. 전날에 업무량을 적절히 판단해 하루 일정을 짜고, 그에 맞게 움직이기만 한다면 오전 10시에 일어나 11시까지 출근해도 문제가 없다.

느지막한 출근길, 휴대폰을 들여다보면 간밤에 팀원들이 나를 애타게 불렀는지 알림이 잔뜩 와 있다. “미리 준비한 회의록 확인하시고 피드백 주세요”, “콘텐츠 원고 올렸습니다. 보시고 피드백 부탁드립니다.” 알림을 확인하고 나를 소환한 팀원들의 목소리에 응답한다. 가끔 길게 답을 남기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이런 메시지엔 이모지(emoji·그림문자)로 답한다. 체크 표시 이모지나, 박수를 치는 이모지, 엄지를 치켜든 이모지,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이모지가 주로 쓰인다. 형식을 갖추는 것보다는 빠른 소통에 우선순위를 둔다.

대표도, 신입도 별명으로 부르는 수평적 문화도 스타트업의 뚜렷한 특징이다. 회사의 대표나 작은 단위인 팀 또는 셀을 이끄는 책임자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일방적으로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직위는 어디에도 없다. 서로는 서로를 설득하기 위해 애쓸 뿐이다. ‘선배’도 팀장‘님’도 없는 회사에서 ‘권위의식’ 같은 건 전생에 두고 온 단어 같다.

해야 할 일을 일방적으로 정해주는 사람도 없다. 모두는 각자의 목적과 필요에 따라 자발적으로 모여 일한다. 엊그제, 새로 꾸린 티에프(TF)팀을 어떻게 꾸려나갈지를 의논하는 회의가 열렸다. 며칠 전 점심시간, 회사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팀원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다 ‘새로운 티에프를 만들어 일을 본격적으로 해보자’고 의견을 모은 것이 발단이었다. 이야기가 나온 지 24시간도 채 되지 않아 티에프가 열렸고, 목표와 회의 방식이 결정됐다. 콘텐츠 기획 아이디어를 이것저것 내놓던 중 동료 디자이너가 말했다. “우리 이제 엄청 바쁘겠네요. 근데 전 재밌으면 힘들어도 상관없어요.” 어쩌면 이 말은 나와 팀원들, 스타트업에 몸담은 이들을 고루 설명할 수 있는 한마디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우리에게 ‘재미’는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강력한 가치다.

나답게 일할 수 있는 환경

사무실의 팀 사이엔 벽이 없다. 물리적으로도, 업무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다른 팀의 업무를 파악하거나 긴밀하게 협업할 때 정해진 계통을 밟아 공식적으로 정보를 요청해야 하는 대부분의 일반 회사와는 다르다. 모든 정보는 팀원 전체에게 공평하게 열려 있다. 우리 회사는 ‘슬랙’이라는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는데, 이 앱에선 다른 팀이 어떻게 일하는지, 다른 팀원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확인도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모든 업무는 공개된 채널에서 이루어진다. 업무와 관련된 진행 사항을 뒤늦게 전해 듣고 “어? 나는 그 얘기 못 들었는데, 어디서 얘기한 거야?” 같은 속상한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다. 다른 업무 툴도 기본적으로 개방형이다. 협업 툴이자 메모용으로 쓰는 ‘노션’, 구글 드라이브도 민감한 일부 개인정보 외에는 누구나 볼 수 있게 열려 있다. 정보를 둘러싼 불필요한 신경전이 처음부터 일어날 수가 없는 환경인 것이다.

물론 이런 환경이 늘 반가운 건 아니다. 모두에게 채널이 열려 있다는 건, 사방에서 끝없이 울리는 알람에 답할 준비를 매순간 하고 있어야 한단 뜻이기도 하다. 이런 환경만 생각하면 스타트업의 ‘워라밸’을 입에 올리기가 민망하다. 일이 삶에 섞여 있고, 삶이 일에 스며드는 형태로 굴러가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늘 과로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무수한 장점이 과로의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평등하고 유연한 조직문화, 성별이나 성정체성을 이유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약속, 믿을 수 있는 동료들로 구성된 팀…. 강한 자기애와, 자기존중감을 뜻하는 ‘나다움’을 지키는 일은 인생의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1년 후 당신은 이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 있을 것 같나요?”

2주일에 한번, 셀의 리더와 하는 일대일 미팅에서 받는 질문이다. 그 질문엔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담겨 있다. 그런 의문문을 받아들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격주에 한번씩, 1년 후의 내 모습에 대해 상상해보게 된다. 어느 방향으로 성장하고 싶은지, 나는 지금 어느 위치에 있는지 끊임없이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질문에 응답하면서 조금씩 성장하는 나를 발견한다. 매일매일, 어제보다는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된다고 느낀다. 그 감각은 안정적인 큰 기업보다 스타트업에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걸기로 한 이유이기도 하다.

스스로 커나가는 이곳

청년 세대는 언젠가부터 다른 세대에 의해 ‘엔(N)포 세대’로 호명되어왔다. 결혼도, 출산도, 연애도, 집을 사는 일도 포기한 세대로 말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가 선택하고 집중하던 가치와는 다른 쪽으로 가기로 마음먹은 것에 가까울 수도 있다. 내 경우, 안정적인 직장 대신 불안정하지만 재미있는 일을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업무 환경과 선배에게 배우는 대신 스스로 길을 만들며 커나갈 수 있는 스타트업을 택한 것뿐이다.

언젠가는 지치거나 지루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할 질문을 미리 만들어놨다. 첫째, 재미있는가? 둘째, 어제보다 오늘 더 성장했다고 느끼는가? 셋째, 1년 후의 내 모습이 잘 그려지는가? 이 세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기만 한다면, 그다음날의 내 아침도 오늘처럼 알람 없이 시작될 것이다.

천다민 뉴닉 에디터

▶ 19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사람들을 밀레니얼 세대라고 한다. 정보기술(IT)에 능하고 개성이 강하며 부당한 일에 적극 목소리를 내고 앞날에 대한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갖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 ‘나 때는 말이야’라고 툭하면 가르치려는 ‘라테 세대’는 모르는 밀레니얼 세대의 문화를 소개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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