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K-여동생’들은 오롯이 오빠를 위한 삶을 살았다. <청춘의 덫> 강동숙(허영란)은 오빠 집에서 내내 밥 차려주고 청소한다. 유튜브 화면 갈무리
지금까지 ‘토요명작 리플레이’에서 주옥같은 명작드라마 15편을 소개했다. 옛날 작품을 되짚으면서 고심한 건 ‘지금 보면 불편’한 장면을 꼽는 부분이었다. 수십년 전 시대를 지금 시선으로 평가하는 게 맞는 것일까? 여러 가지 감수성이 부족했던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을 테니까. 그런데도 꾸준히 언급한 이유는 ‘지금 보면 불편해요’라는 소소한 꼭지가 시대의 큰 변화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가장 큰 ‘변화’는 그때의 로맨스가 지금은 추행이 된 행동들이다. <네 멋대로 해라>, <청춘의 덫>을 포함해 절반 이상에서 이런 행동이 등장했다. 당시 <네 멋대로 해라>의 한동진(이동건)은 진경(이나영)의 마음을 얻으려고 허세도 부리는 귀여운 남자였다. 지금 보면 그가 한 행동들은 사랑이 아닌 ‘추행’이다. 진경은 만취한 동진을 자신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호텔에 데려다주는데, 동진은 그 틈에도 진경을 덮치려고 한다. 뜬금없이 안고, 뽀뽀하려 들고…. 그런데도 당시에는 그저 “참 이상한 아저씨” 정도로만 여겨졌다.
<마지막 승부>의 윤영아(전유진). 오빠 밥상에 아빠 술상 차려주는 장면이 대부분이다. 그는 자신이 일해서 오빠를 대학에 보내려고 한다. 유튜브 화면 갈무리
‘무데뽀처럼’ 등장했던 폭력적 장면
<청춘의 덫> 노영국(전광렬)은 지금 시선에서 ‘신세가 역전’된 대표적인 인물이다. 당시 이 캐릭터에 왜 설렜을까 싶을 정도로 대사 한마디, 행동 하나 모두 불편하다. 노영국은 비서인 서윤희(심은하)한테 “서 대리는 싱싱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직은 볼만하다”는 등 수시로 외모를 평가한다. 비서한테 자신의 할머니 병시중도 들게 하는 등 상사의 갑질로 볼 수 있는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아, <서울의 달>의 순박한 청년 박춘섭(최민식)한테서 스토커의 기질을 보다니. 차영숙(채시라)한테 반해 집앞에서 기다리는 것은 예사이고 출근길까지 따라간다. 김운경 작가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당시에는 일방적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게 사랑이라 여겼던 시절이라 대본에 썼지만, 지금은 있어서는 안 되는 설정”이라며 “지금 같으면 스토커로 신고해야 할 일이다”라고 말했다.
“다 너를 위해서”라며 사랑으로 포장되던 폭력적인 행위도 자주 언급했다. <마지막 승부>에서는 농구팀의 선배가 후배한테 수시로 폭력을 행사한다. 김만재(허준호)는 라이벌전에서 졌다고 몽둥이를 들고 후배들 엉덩이를 때린다. 이런 행위들은 선배의 사랑으로 포장됐다. <사랑이 꽃피는 나무>에서는 의대생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전통이라며 선배들이 후배들을 잠재우지 않고 우리 몸속 뼈 이름을 외우게 한다. 너무 힘들어 도망치려는 후배는 끈기 없는 패배자인 것처럼 여겼다. “우리 때도 다 그랬다”는 말은 지금은 사라져야 할 대사다.
옛날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결정적인 장면은 지금부터다. 이름 한번 붙여봤다. ‘케이(K)-여동생 잔혹사.’ 달라진 시대에 다시 보니, 옛날 드라마 속 세상에서 많은 ‘케이 여동생’들은 내 삶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희생을 강요받았고, 아니 그게 당연한 줄 알며 스스로 희생했다. <청춘의 덫> 강동숙(허영란)은 오빠 강동우(이종원) 집에서 이른바 ‘식모살이’를 한다. 강동우가 노영주(유호정)가 얻어준 아파트에서 혼자 살게 되자 그의 부모는 집안일을 해주라며 강동숙을 오빠 집에 보낸다. <마지막 승부>에서 윤철준(장동건)의 동생 윤영아(전유진)는 오빠를 대학 보내려고 자신의 삶을 희생한다. “내가 오빠 대학 보내줄게. 나야 어차피 계집애니까 여상 나오고 말 것이지만 오빤 원래 대학 가기로 작정했잖아. 오빤 꿈도 없어? 참고서건 뭐건 내가 다 구해줄게.” ‘여동생’한테도 꿈이 있잖아! 누가 현실에 순응하게 한 거냐, 시대를 거슬러 가 따져 묻고 싶다. 곧 소개할 <육남매>에서 말순(송은혜)은 오빠 밥 안 차려준다고 엄마한테 꾸중 듣기 일쑤다.
남성 우대가 팽배했던 1980~90년대는 ‘여동생’도 누나도 모두 장남을 위한 인생을 살았다. 누나들은 부모를 대신해 집안의 대소사까지 고민해야 하는 등 가장과 다름없는 무거운 인생을 살았다. <서울의 달> 차영숙도 트럭을 몰고 채소까지 팔며 살림을 건사했고 동생 공부까지 시켰다. 누나들의 희생은 최근 들어 ‘케이 장녀’라는 말로 많이 늦었지만 조명받고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에서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 했던 중전의 서사가 부각되면서부터다. 오롯이 오빠를 위한 삶을 살았던 ‘케이 여동생’은 누구한테도 위로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희생으로 성장했던 드라마 속 오빠들도 고마운 줄 모르고 한결같이 화만 낸다. 드라마 속에서도 윤철준과 강동우가 동생들한테 웃어주는 장면은 거의 없다. 1990년대 이후 남녀평등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나오면서 ‘여동생’과 ‘누나’들은 때론 시대를 거스르기도 했다. 곧 소개할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이후남(김희애)은 부모 몰래 대입시험을 치른다.
그 시절에는 ‘여동생’은 물론 ‘맏딸’도 장남을 위해 희생해야 했다. 하지만 <아들과 딸> ‘후남이’(김희애)처럼 시대에 맞서 행동하는 이들도 있었다. 유튜브 화면 갈무리
‘케이 여동생’ 서러워 함께 울던 이들
그 시절 ‘케이 여동생’으로 살았던 이들도 옛날 드라마를 보며 자신의 인생을 곱씹는다. 한 시청자는 “초등학교 시절 오빠 밥을 해주느라 학교 마치면 바로 집에 와야 했다. 그래서 친구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개인 블로그에 썼다. 글만 읽어도 가슴이 아린다. 또 다른 시청자는 “그래서 과거 드라마를 보면 때론 눈물이 흐르기도 한다”고 말했다. 김운경 작가는 “시대별 드라마를 통해 문화적인 가치가 새롭게 정립되고, 사회가 제대로 되어가고 있다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지금 세대는 그 시절이 불편할 수 있지만, 당대를 담은 드라마는 지금의 제작진을 성찰하게도 한다. 과거와 달리 요즘에는 오히려 뜨거운 논쟁들이 갈등을 불러온다는 이유로 드라마에서 마치 없는 일처럼 소홀히 다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네 멋대로 해라> 박성수 피디는 “좋은 작품은 시대의 가치관적 갈등과 통념을 담고 있어야 한다”며 “옛날 드라마를 보면서 요즘 드라마들이 이 시대의 담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성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 시절을 보낸 수많은 ‘케이 여동생’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케이 여동생’의 희생으로 많은 오빠들이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그 시절 눈물 훔쳤을 ‘케이 여동생’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케이 여동생’ 잔혹사로 꿈을 이룬 세상의 많은 윤철준이여, 강동우여! 지금이라도 감사한 마음을 표현해주기를.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언제든 옛날 콘텐츠를 다시 볼 수 있는 시대. 세대 불문 되감기하면 좋을 대중문화 작품을 소개한다. 연출, 연기, 이야기 기본 3박자에 충실하면서도 마음을 움직이는 옛 작품들이 콘텐츠의 본질을 일깨운다. 지금 시선에서 새 해석이 등장할지도. 제작진과 배우들의 비하인드 코멘터리도 담아보겠다. 3주에 한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