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레드벨벳(왼쪽부터 조이·예리·아이린·슬기·웬디)이 22일 온라인 팬사인회 참석을 위해 서울 성동구 SM엔터테인먼트 사옥에 모였다.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지난 22일 저녁 7시, 에스엠(SM)엔터테인먼트의 카카오톡 계정에서 기자에게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심호흡을 하고 통화 버튼을 누르자 화면 너머로 그룹 레드벨벳의 웬디(본명 손승완)씨가 보였다. 응원의 말 몇마디를 건네는 것도 잠시 2분이 지났고, SM 직원의 “종료해주세요”라는 안내가 들렸다. 아쉬움을 담아 휴대전화 카메라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레드벨벳의 온라인 팬사인회가 그렇게 끝났다.
영상통화 사인회는 지난해 코로나19 유행 이후 처음 등장했다. 가수가 팬과 화상으로 대화를 나누고, 앨범에 사인을 해 택배로 보내준다. 팬들은 흔히 ‘영통 팬싸’로 줄여 부른다. 오프라인 공연·팬미팅 등이 모두 중단된 요즘, 팬과 가수를 이어주는 ‘비대면 소통’이다. 공간 제약 없이 스타를 만날 수 있다는 장점 덕분에 케이팝 문화의 ‘문턱’을 낮추고 팬층을 넓혔다는 평가도 나온다.
팬싸 참여 여부는 추첨에 달려있다. 통화를 나눌 ‘최애’ 멤버를 선택한 다음 기획사가 지정한 온라인 상점에서 앨범을 주문하면 응모가 된다. 앨범 한장마다 응모권 한장이 접수돼, 여러 장을 살수록 당첨 확률이 높아지는 방식이다. 7년차 케이팝 팬인 김아름(24)씨는 “최고 인기를 누리는 ‘1군’ 남자 아이돌 사인회의 경우 앨범을 박스채 사는 사람들이 많아 평생 한 번 당첨되기도 어렵다. 행사가 비대면으로 바뀐 뒤에도 응모 열기는 떨어진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다만 추첨이 무작위인 만큼 1, 2장 구입하고 당첨됐다는 후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그동안 기자의 경우 최대 20장을 응모하고도 모두 떨어졌지만 이번에는 한 자릿수의 앨범을 사서 뽑혔다. (케이팝 팬덤에서는 경쟁률 상승 등을 우려해 정확한 ‘당첨 컷’ 공유를 금기시하는 분위기다.)
당첨 행운을 누린 팬은 장소 섭외 등으로 바빠진다. 백화점·놀이공원 등 한 장소에서 열리던 기존 사인회와 달리 ‘영통 팬싸’의 경우 장소에는 제약이 없지만 팬들은 좋아하는 아이돌에게 특별한 장소를 보여주고 싶다. 배경에 포스터·포토카드 등 ‘굿즈’들을 채워 가수의 관심을 끄는 것은 기본이다. 조용한 곳에서 대화에 집중하기 위해 스튜디오나 호텔을 빌리는 경우도 많다. 사인회 진행 경험이 많은 한 연예계 관계자는 “가수에게 ‘특별한 팬’으로 기억되기 위해 팬들은 특별한 장소를 고르려 노력한다. 멋진 풍경을 보여주려고 바닷가에 차를 몰고 가서 영상통화를 받은 팬도 있었다”고 전했다.
영상 통화에서 할 말도 밤잠을 설치며 치밀하게 준비 한다. 통화 시간이 빠듯한 만큼, 가수에 대한 애정을 압축적으로 전할 표현을 짜오는 것이다. “이번 앨범 너무 허전해요”라고 운을 뗀 뒤, 스타가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면 “명불‘허전’이에요”라고 덧붙이는 식이다. 대면 행사 때보다 팬들이 덜 긴장하고 기발한 멘트를 준비해오는 경우가 늘었다고 한다. 연예계 관계자는 “상황극 같은 대화를 시도하거나, ‘틱톡’ 영상처럼 귀여운 표정을 지어달라고 하는 팬도 많다”면서도 “개인기나 동작 등을 과하게 요구하면 가수가 부담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화면에는 나오지 않지만 가수 옆에서 다른 스태프들 여럿이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당첨자에게 발송되는 안내문. 참가자 20% 이상이 해외팬이어서 영어·일본어·중국어 등 4개국어로 안내된다.
이날 웬디씨와의 통화에서 기자의 전략은 ‘칭찬 공세’였다. 그의 앨범 컴백과 라디오 진행자(DJ) 데뷔를 축하한 뒤, ‘진행을 잘하고 목소리가 좋다’는 등 찬사를 보냈다. “‘아이스크림케이크(첫 미니앨범)’ 때부터 팬이었다” “그 뒤로 매번 팬싸 도전했다”며 팬심도 고백했다. 그는 “감사하다. 이런 응원 덕분에 힘을 낸다”며 웃었다.
다만 2분은 야속할 만큼 빠르게 지나갔다. 준비한 말은 절반만 전할 수 있었다. 노트북 스피커가 갑자기 말썽을 일으켰을 때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대신 웬디씨는 시간 종료를 알리는 직원 안내에도 얼마간 통화를 끊지 않으며 ‘팬싸 초보’ 팬을 배려했다. 그는 종이에 레드벨벳의 노랫말 중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한 소절을 사인과 함께 적고 화면에 보여준 뒤 통화를 마쳤다.
이날 행사에서 레드벨벳 멤버 다섯 명은 각각 30명의 팬들을 만났다. 참가자 5명 중 1명은 외국인이었을 만큼 해외팬 비중도 높았다. 기획사들은 비대면 행사 이후 아이돌 문화의 ‘진입장벽’이 낮아진 효과라고 분석한다. 장소 제약이 사라진 데다, 옆 사람 눈치를 보지 않고 스타와 ‘1 대 1’로 대화하게 되면서 팬들의 국적·연령 등이 다양해진 것이다.
SM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이전까지는 ‘아이돌 문화는 그들만의 세상’이라는 인식이 강했다면, 요즘은 행사 장면이 밈(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이미지·동영상)처럼 퍼지며 새로운 팬층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언택트 행사들이 케이팝의 화제성을 높였다”고 설명했다.
가수들 역시 팬과의 새로운 소통방식에 적응하며 행사를 즐기는 모습이다. 웬디씨는 “(코로나19 기간이지만) 비대면 팬사인회를 통해 팬들에게 좋은 말, 힘이 되는 말들을 들으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구나’라고 실감한다”며 “온라인으로 사인회를 하다 보니 (인터넷 연결이 끊기는 등) 통신 관련 해프닝이 생길 때도 있는데, 그럴 때도 이해해주고 기다려주는 팬들에게 감사하다”고 전했다. 천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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