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후 한승헌 변호사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한 조문객이 고인의 약력 등을 살펴보고 사진을 찍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말이 넘치는 세상이라지만, 한승헌 변호사님을 떠나보내는 슬픈 마음을 담아낼 문장을 쉽게 찾기 어렵습니다. 우리 시대의 큰 어른인 변호사님의 지난 삶을 감히 평가하는 것은 부족한 저의 깜냥을 벗어난 일이라, 짧은 시간이었지만 변호사님과 함께 보냈던 경험을 다른 분들과 나누는 것으로 추모의 글을 갈음하고자 합니다.
변호사가 되고, 신참내기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에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던 2016년 겨울 한승헌 변호사님과 처음으로 간단한 일을 같이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실 ‘일’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민망한 단순 사무였지요. 한승헌 변호사님의 모교인 전북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민변에서 발간한 책 중에서 여분이 남아 있는 책이나, 소장하고 있는 책과 자료들 중에서 여분이 있어 함께 보낼 수 있는 책들을 선별한 뒤 포장해서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내용을 전달받아 준비하던 중 변호사님께서 직접 연락을 주셨습니다. 늘 먼발치에서 뵈었던 대선배님과의 갑작스러운 통화로 조금 긴장했는데, 변호사님께서는 언제나처럼 단번에 상대방을 무장해제 시키는 특유의 유머와 위트를 발휘하셨습니다. 변호사님께서는 “이렇게 민변의 책이 대학 도서관에 비치되어서 민변의 간판이 빛난다면 그 공로는 전적으로 조 변호사가 아니라 나에게 있지요. 민변의 간판 글씨를 내가 썼으니까요” 라고 하시며 저의 긴장(?)을 살포시 풀어주셨습니다.
사실 ‘잘 부탁한다’는 짧은 한마디로 충분할 수 있는 통화였는데, 변호사님께서는 차분하게 왜 본인이 이런 부탁을 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주시고, 수고에 감사한다는 말씀을 여러번 하셨습니다. 짧은 통화였지만, 마치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이 상대방의 진심이 느껴졌던 경험이라 그 뒤로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민변 사무처에서 고생하고 있는 ‘일꾼’들의 이름을 남몰래 알려달라고 하시고선, 직접 한명 한명의 이름을 친필로 담은 시집 <하얀 목소리>를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때 ‘내가 민변에서 책을 좀 빌려간 셈이니, 이자를 곱절로 보태 책으로 갚겠다’고 하셨고, 결국 얼마 뒤 변호사님의 저서와 옥중에서 공부하셨던 저작권 분야의 귀한 전공서적들을 보내주시는 것으로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게다가 몇년 전에는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공익소송을 위한 변론기금을 모으는 후배들을 위해 ‘시민변론기금’이라는 글씨를 손수 써 보내주시기도 했습니다.
처음, 변호사님을 보면서 참 닮고 싶은 어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저희 또래는 변호사님께서 법정에서 활약하시던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삶을 잘 알지 못합니다. 변호사님께서 쓰셨던 자서전 <한 변호사의 고백과 증언>을 비롯한 저작들과, 그리고 얼마 전 출간된 <한승헌 변호사의 삶―균형과 품격>을 통해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을 뿐입니다.
책에서 만난 변호사님께서는 암흑의 시절에 진실의 불꽃을 지켜오셨습니다. 아무도 진실을 묻지 않았던 유신시대 법정에서 변호사님은 모든 법률가의 귀감이 되는 성실하고 훌륭한 변론을 하셨습니다. ‘법대 위에서 진실에 침묵하는 판사들이 조금이라도 부끄러워하도록’ 법리에서도 한치의 부족함이 없으면서도, ‘법정에 선 피고인들이 조금이라도 위축되지 않도록’ 피고인의 투쟁의 정당성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변론하는 용기 있는 변호인이셨습니다. ‘분지 필화사건’ ‘동백림 사건’ ‘오적 필화사건’ ‘민청학련 사건’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 등 시대의 진실이 담긴 사건들에서 변호사님은 온몸으로 ‘하나의 진실’을 지켜내는 외로운 소명을 언제나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얀 수의를 입고 고개 숙이지 않고 당당히 법대를 노려보는 변호사님의 사진에는 진실을 지켜온 파수꾼의 당당함이 있었습니다.
유럽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된 김규남 의원을 애도하는 수필 ‘어떤 조사(弔辭)’를 썼다는 형식적인 이유로, 다른 한번은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의 피고인으로 두차례 옥고를 치르고 8년 동안 변호사 자격이 박탈되는 상황에서도 변호사님은 삶에 대한 여유와 유머를 놓지 않으셨습니다. 두번째 수감을 ‘감옥 재수’라고 부르시며, 옥중에서 그때만 하더라도 국내에 낯설었던 새로운 학문인 저작권을 공부하셨습니다. 민주화 이후 감사원장과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올바른 감사제도와 사법개혁에 헌신하셨던 변호사님은 말 그대로 우리 시대의 큰 어른이셨습니다.
변호사는 법정에서의 변론을 잘 수행해야 하지만 재판에 정의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할 때, 그 실상을 기록해서 동시대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또 다음 세대에 이를 전해줄 의무가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변호사로서 변론의 기록을 성실히 남기셨을 뿐만 아니라, 감옥에 수감되고 변호사 자격이 박탈된 상황에서도 ‘삼민사’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여 시집, 산문집, 논문, 법학전문서적까지 폭넓은 분야에서 40권이 넘는 성실하고 방대한 시대의 기록을 남기셨습니다. 출판사 경영이 법조인으로서는 예상치 못한 ‘외도’라고 하시면서도, ‘그 외도는 탈선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히고 인심의 따스함과 차가움을 아울러 체험하여 삶을 성숙하게 해준 수확이라 하셨습니다.
변호사님께서는 늘 스스로 인권변호사라고 소개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변호사라면 모름지기 인권 변호가 본연의 업무인데, 본업을 하는 사람을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마치 ‘공 차는 축구선수’ ‘헤엄치는 수영선수’와 같은 동어반복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권변호사라고 부르는 세상 사람들보다, 변호사 스스로 자신이 ‘인권변호사’라고 불리는 것에 경계하고 겸손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배웠습니다.
또한 변호사님께서는 ‘나를 의롭다 믿고서 남을 하대하지 말자’고 하셨습니다. 여야로 나뉘어 사회적 갈등과 대립이 격해지고 있는 요즘, 변호사님께서 세상 끝까지 가서 마주하신 지혜와 균형의 품격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제가 좋아하는 한승헌 변호사님의 시 ‘노숙’의 한 문장을 소개하는 것으로 부족한 추모의 글을 맺습니다. 변호사님, 보고 싶습니다.
산다는 것은 하나의 진실을 마련하는 일/ 그것은 외로운 작업/ 벅차고 눈물겨운 일이다.
조영관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차장